여야 악화의 '주범'은 '독립군 함승희'

[정치 톺아보기 17] 함승희 의원 청문회에서 '일' 냈다

등록 2003.04.30 10:30수정 2003.08.1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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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고 새우는 신춘에 여야 관계가 난데없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그 발단은 국가정보원장 후보 인사청문회가 제공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번 사태의 시말(始末)은 △ 인사청문회 △ 후보 '부적절' 경과보고서 채택 △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원장 임명 강행 및 국회 '월권' 발언 △ 한나라당의 집단반발 및 인사청문회법 개정 추진 등으로 갈등이 점점 고조되는 양상이다.

사실 국정원장 인사청문회를 앞둔 상황에서, 아니 청문회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 또한 앞서의 검찰총장·국세청장·경찰청장 청문회처럼 '무사 통과'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에도 여야 정보위원들이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비토'(부적절) 의견에 합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전후맥락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이런 '이변'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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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구 국정원장 내정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는 함승희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나라 공안파·민주 구주류·국정원의 '3자 공모설'

가장 그럴 듯한 가설(假說)은 개혁 및 인적 청산의 대상이 된 국정원 및 일부 간부들의 '구명운동'과 한나라당 소속 공안·보수파 정보위원들의 '호응' 그리고 민주당 소속 호남·구주류 출신 위원들의 '시위'가 결합된 '계획된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특히 진보적인 성향의 서동만 교수가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내정되어 개혁과 인적 청산을 주도할 것이라는 소식은 이 세 집단의 결속과 위기의식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문회를 앞두고 필자가 접한 일부 국정원 간부들은 고영구 후보에 대해서는 "온건 합리적인 분"이라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서동만 교수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혹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고 말해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서 교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위기의식이 '의회 로비'로 이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또 한나라당 소속 정보위원들의 경우, 간사인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 갑), 홍준표 의원(서울 동대문 을), 유흥수 의원(부산 수영) 등이 청문회를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각각 국가안전기획부 1차장, 강력부 검사 및 안기부 파견, 치안본부장 경력을 가진 '공안통'으로 분류된다. 민주당 소속 정보위원들 또한 간사인 함승희 의원(서울 노원 갑)을 제외하고는 김옥두(전남 장흥-영암)·박상천(전남 고흥)·정균환(전북 고창-부안)·천용택(전남 강진-완도) 의원이 모두 '구주류'이거나 호남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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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설은 '사실 왜곡'이거나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을 뿐

그러나 이 또한 '사실 왜곡'이거나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을 뿐이다.

우선 박헌기(경북 영천)·이규택(경기 여주)·이윤성(인천 남동 갑) 의원 등 나머지 절반의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은 청문회에서 고영구 후보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이윤성 의원은 고영구 후보가 이부영 의원의 '생명의 은인'임을 내세워 그의 인간미를 소개했고, 이규택 의원 또한 여러 발언에서 친근감을 표현했다.

또 민주당 호남 출신 의원 중에서 동교동계인 김옥두 의원과 범동교동계로 분류되는 박상천 의원은 고영구 후보를 지지했다. 역시 '범동교동계 구주류'인 정균환 의원(민주당 원내총무)은 오전에 잠깐 출석했다가 자리를 떠 고영구 후보에 대한 질문이나 발언 자체를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반대 입장을 취한 천용택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일찌감치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에 대한 '병풍' 공세에 앞장선 '친노파'로 분류된다. 따라서 그가 고 후보와 특히 서 교수를 반대한 것은 전 국방장관·국정원장으로서 그가 '체득한 경험지식' 때문이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또 사회를 본 김덕규 의원(민주·서울 중랑 을)은 위원장이어서 의견 자체를 피력하지 않았지만 그와 고(高) 후보는 11대 국회 때 같은 재야 출신으로 민한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김 의원은 부인이 고(高) 후보 부인과 친목계를 함께 할 만큼 가까운 '후원자'이다.

결국 '존재의 의미'를 과시할 필요가 있던 한나라당 공안파와 민주당 구주류 그리고 국정원이 결탁해 고 후보와 서 교수를 비토(거부)한 것이라는 '3자 공모설'은 이렇다할 근거가 없거나, 단지 '절반의 진실'에 근거한 '사실 왜곡'에 가까운 것이다.

청문회 찬반 분위기 좌지우지한 '독립군 함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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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구 국정원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사실, 여야 관계를 악화시킨 인사청문회 파문의 결정적 변수는 한나라당 주류세력도 아니고 민주당 구주류도 아니었다. 이날 차분하게 진행된 청문회장의 분위기를 고 후보를 반대하는 쪽으로 결정지은 것은 '독립군' 함승희 의원이었다. 공교롭게도 고영구-함승희 두 사람 모두 강원도 출신이다.

함승희 의원은 신주류에도 구주류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부 검사 출신 초선 의원이다. 이른바 '개혁 서명파'인 그는 민주당의 진로와 관련해선 "당명을 바꾸고 개혁세력을 수혈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 정책과 '개혁 독점' 현상에 대해선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소신파'이다. 그는 오랜 특수부 수사검사 생활을 통해 체득한,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독불장군' 기질을 이번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선 함 의원은 위원장을 제외한 여야 정보위원 11명 가운데 가장 잘 준비된 청문위원(聽聞委員)이었다. 불가피하게 말을 끊을 때는 "조금 더 답변할 기회를 드렸으면 좋은데 시간제약을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청문회는 본디 '듣는 자리'이지만, 늘 그렇듯이 다른 의원들은 청문(聽聞)보다는 질문(質問)을 더 중시했다.

함 의원은 청문회에서 유일한 국가 정보기관장으로서의 애국심(사상·충성심)과 전문성 그리고 과거 폐단에 대한 개혁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고영구 후보가 재산이나 도덕성 면에서 흠결(欠缺)을 찾을 수 없자 '공안검사'의 시각에서 애국심을 가지고 사상검증을 시도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검찰총장·경찰청장·국세청장과 달리 국정원장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국가안보의 최종 책임자라는 점에서 도덕성보다 애국심을 내세운 함 의원의 검증 기준은 타당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보기관이 국가정보기관(CIA)·정보위원회·청문회 제도 등을 모두 본떠온 바로 그 '미국식' 모델의 전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함 의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합당한 것이다.

"실정법 질서의 수호를 제일의 사명으로 하는 판사의 직에 있었던 후보자가 이러한 사법부의 판단을 부정하고 반국가단체, 또는 반국가활동을 한 자(필자주- '간첩 김낙중'씨와 재일 '한통련')를 옹호·지원해온 이런 후보자의 행태에 비추어볼 때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가정보기관의 총수로서 사상성 내지 애국심에 본 위원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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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애국심과 전문성보다는 개혁성과 '코드' 맞는지가 기준

두 번째 기준인 전문성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의-답변에서 드러나듯, 여야를 떠나 고 후보자의 비전문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함승희 위원 "대통령이 정보분야의 비전문가인 고(高) 후보자를 국가정보위원장으로 내정한 것은 국가정보원의 국가안보 상의 절대적 중요성을 도외시한 인사가 아닌가 본 위원은 생각하는데 고(高) 후보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영구 후보자 "지금 함(咸) 위원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제가 정보분야에 대해서 전문지식이나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정을 합니다."

함 의원은 이어 애국심과 전문성의 기준이 아니라 '집권세력과 코드가 맞는가'의 기준에 따라 국정원 간부를 인선해서는 안된다면서 노무현 정부 들어서 유행어가 된 이른바 '코드'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정권이 바뀌면 전문성이나 애국심은 뒷전이고 이른바 집권세력과 코드가 맞는가 그리고 얼마나 개혁적인가 이 두 가지 기준만으로 국정원장을 임명해왔습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국정원장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전문성과 애국심이 기준이 아닌 네 편인가 내 편인가 하는 그런 기준 아래 유능한 정보전문가들을 내쫓거나 좌천시켜 왔던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내부사정에 정통한 자가 개혁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세 번째 기준인 개혁성과 관련해서는 함(咸) 의원은 "노(盧) 대통령이 정보기관장으로서의 전문성이 결여된 고(高) 후보자를 국가정보원장으로 내정한 것은 후보자가 지닌 개혁성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개혁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해 그에 대한 답변을 이끌어냈다.

함승희 위원 "지난날 YS나 DJ 정권 때도 그랬듯이 과거 박정희 또는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 시절 반정부활동을 했거나 인권운동을 하기만 했으면 대단히 개혁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개혁성 판단기준이라고 본 위원은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권운동은 곧 개혁성입니까?"
고영구 후보자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이 바로 개혁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함 의원의 진단에 따르면, 과거의 개혁이라는 것은 정보기관의 내부사정에 정통하지 못한 집단이 피해의식에만 가득 차서 우리편이 아니었던 인사들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내쫓거나 좌천시킴으로써 오히려 조직 내부의 분열과 내부기밀의 외부누설만 조장하면서 국가통치능력을 점점 저하시키고, 국가기강을 무너뜨리고, 국가안보 관련 정보능력은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했을 뿐이다. 국정원 개혁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이것이다.

"결국 조직내부의 개혁이라는 것도 내부사정에 정통한 자만이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더 이상 한풀이식 개혁은 안된다는 것이 본 위원의 생각입니다."

"함승희 의원한테 한방 먹었다"

인사청문회 전에 함승희 의원은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여야를 떠난 '철저한 검증' 원칙을 밝힌 바 있다. 함 의원은 그 원칙대로 국가관(애국심)과 전문성 그리고 개혁성을 기준으로 철저하게 검증해 고 후보로부터 사실상 위 세 가지 기준에 미흡하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형근 의원의 첫 멘트는 "함승희 위원께서 조목조목 날카롭게 질의하셔서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날 청문회장의 분위기는 함승희 의원이 주도했다. 오전 청문회가 끝나고 한 정보위원의 보좌관은 "함승희 의원한테 한방 먹었다"고 표현했다. "함 의원이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을 몰랐다"거나 "같은 여당 의원인데 비교된다"는 말도 나왔다. 한 보좌관은 "오후에는 우리도 검증 수위가 세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조화 속에서 여야는 모처럼 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적어도 국정원에 대한 시각은 오히려 여야가 뒤바뀌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특히 정형근 의원의 발언은 '언제 저 양반이 국정원을 저렇게 흔들었던가' 하고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국정원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국정원에 대한 '애정'과 애국심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결같이 고영구 후보자와 기조실장으로 사실상 내정된 서동만 증인의 사상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색깔시비'를 벌였다. 즉 '간첩 김낙중'을 평화주의자로 옹호하면서 석방운동을 하고 대법원으로부터 반국가단체 판결을 받은 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활동을 지원한 고영구 후보자와 친북 편향성이 강한 서동만 교수가 국정원의 정무직을 맡을 경우 간첩 잡는 국정원 직원들의 '정체성'을 헷갈리게 하고 나아가 국정원을 '오염'시킨다는 논리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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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고영구국가정보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이 자초한 화(禍)

민주당 의원들은 고영구 후보자와 서동만 내정자가 모두 정보에 대한 전문지식과 경험이 없는 비전문가여서 부적격하다는 논리를 폈다. 특히 천용택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은 '민간인 서동만'을 국정원 조직 개선운영에 관한 TF팀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국정원 업무보고 청취 때 배석시킨 점을 문제삼았다. 서동만 교수는 물론, 고영구 후보 자신도 아직 정식으로 임명이 안된 상황에서 서 교수를 업무보고에 배석시켜 국정원 조직·인원·예산 등 국가기밀을 노출시킨 것 자체가 국가 최고 정보기관 책임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논리였다.

양당의 접근방식은 달랐지만 '부적절'하다는 결론은 일치했다. 그러나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여야 정보위원들이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에 '부적절' 의견을 제시하는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 본인과 민주당이 자초한 것이었다. 청와대는 물론 민주당도 인사청문회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단 한 차례도 논의하지 않은 채 정보위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한 정보위원은 "당에서 반대하는 데도 '국회의 뜻을 존중하겠다'며 굳이 특검법을 수용할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여야 합의로 이루어진 국회의 의사결정을 '월권'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비판했다. 또 "본래 민주당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빅4' 인사청문회 도입을 반대했었는데, 그것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받아들여 놓고 이제 와서 인사권 침해라고 반발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꼬집었다.

흔히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특히 이번 국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는 국회의원 개인의 역량이 언제든지 정국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굿판'이었다. 그리고 그 '굿판'은 다소 시끄럽고 껄끄럽더라도 보스 정치, 계보 정치, 줄 세우기 정치를 타파해 국회의원 전원을 상대로 대화하고 설득하는 '타협의 정치'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이 기꺼이 감수해야 할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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