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평 의원의 음주운전과 '9 to 5'

[정치 톺아보기 <16>] 국회의원과 운전기사

등록 2003.04.11 15:46수정 2003.04.1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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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평 민주당 의원(서울 관악갑) ⓒ 오마이뉴스 권우성

법률상 국회의원은 4급 2명과 5·6·7급 비서 각 1명 그리고 9급 여비서 1명 등 모두 6명을 보좌진으로 둘 수 있다. 4급은 보좌관, 5급부터는 비서관 혹은 비서로 부른다.

대개 운전기사는 5∼7급 비서관 혹은 비서로 임용하는데 의원과 특별한 관계(친인척)가 아니라면 십중팔구는 7급이다. 7급일 경우 월급 약 170만원과 차량 유지비 약 60만원이 국회에서 지원된다.

국회의원과 비서, 특히 운전기사와의 관계는 '바늘과 실'의 관계이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가고, 실 가는 곳에 바늘 가기 마련이다. 늘 붙어 다니다 보니 운전기사들은 의원들의 약점과 구린데를 훤히 꿰뚫고 있다.

특히 선거기간이나 선거가 끝난 직후의 의원들에게는 '자나깨나 운전기사 조심'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운전기사를 소개받거나 채용할 때 운전 잘하는 사람보다는 '입이 무거운 사람'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운전기사 때문에 패가망신한 '천하의 최규선'씨

지난 정권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3남 홍걸씨 그리고 '넘버 2' 권노갑씨로 이어지는 '3각 연줄 쌓기'로 정치적 야망을 불태우던 '천하의 정치벤처 사업가' 최규선씨가 졸지에 영어(囹圄)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직접적 계기도 바로 운전기사 때문이었다. 최씨의 사례는 운전기사를 잘못 '관리'해 패가망신(敗家亡身)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최씨의 전 운전기사인 천호영씨는 최씨를 형사 고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녹취록을 시민단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려 '최규선 스캔들'에 대한 언론의 추적을 유도했다. 뿐만 아니라 천씨의 후임 운전기사인 백모씨는 최씨가 구속되기 전에 차 트렁크에 숨겨놓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발견해 '이회창 전 총재 20만달러 수수설'을 제기한 설훈 의원에게 접근해 수억원을 대가로 '거래'를 시도했다가 설 의원의 제보로 검찰에 사진을 압수당했다.

지난해 1월에는 권아무개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현직 운전기사인 이아무개(국회사무처 7급 별정직)씨가 보증 선 친구의 빚을 갚기 위해 권 의원의 집에서 금품을 턴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국회의원과 운전기사의 관계는 여전히 천태만상이다.

운전기사 대신에 정책비서 한 사람을 더 쓰고 손수 운전을 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바빠도 운전기사가 밖으로 나와 차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차에서 내리지 않는 의원도 있다. 운전기사를 인간적으로 배려해 주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운전기사가 식사를 하건 말건, 무작정 몇 시간을 기다리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볼일만 보면서 '몸종' 취급하는 의원도 적지 않다.

다음은 현직 국회의원 두 사람을 모시면서 '천당'과 '지옥'을 오간 운전기사 J비서(국회 사무처 7급 별정직)의 눈에 비친 천태만상이다.

여당 중진 J의원의 '고약한 버릇' 세 가지

J의원은 중앙 정치무대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범동교동계 중진 의원이다. 신문 사진이나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얼굴도 늘 웃는 낯이라 대개는 '사람 좋은 정치인'으로 알기 십상이다. 그런데 J의원에게는 남들이 잘 모르는 '고약한 버릇'이 세 가지 있다.

첫째, J의원은 전화를 직접 받는 법이 없다.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운전 중에 전화를 받은 운전기사가 혹시 J의원이 통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바꾸거나,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바꾸기라도 하면 J의원은 어김없이 기사의 뒤통수를 때리며 "전화 하나 못 받냐"며 호통을 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J비서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동여매느라 어금니를 물어야 했다.

둘째, 지역구 순방을 가건 지방 출장을 가건, J비서가 매일 아침 반드시 J의원 앞에 '대령'시켜야 하는 것이 있다. 요구르트와 우유가 그것이다. 그게 뭐 대수냐고 할 법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보통 우유나 요구르트가 아니고 반드시 '바나나우유'와 이른바 '야구르트 아줌마'들이 배달하는 바로 그 원조 '야구르트'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딜 가건 다음날 아침에 덜 고단하려면 운전기사 J씨는 밤중에라도 백방으로 찾아 이를 미리 구해 놓아야 했다.

셋째, J의원은 차안에 칫솔을 갖고 다니며 식사를 한 뒤에는 반드시 양치질을 하는 '좋은 습성'을 갖고 있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양치질할 때 특이한 버릇이 있다. 넥타이를 맨 채 양치질을 할 때 대개는 넥타이 끝을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거나 단추 사이로 밀어 넣는데, J의원은 꼭 운전기사더러 뒤에서 넥타이 끝을 잡고 서 있으라고 한다. 한적한 식당의 화장실이라면 그래도 견딜 만한데, 고속도로휴게소 화장실 같은 곳에서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의원나리 뒤에 서서 넥타이 끝을 잡고 있노라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수밖에.

J비서는 지난 15대 국회 때 J의원 밑에서 그렇게 '험한 세월'을 보내다가 그 일을 한 동안 그만두었다. 그러다 친지의 소개로 99년 10월쯤 L의원 운전기사(7급 비서)로 가게 되었다. 모든 게 전혀 딴 세상이었다. 같은 국회의원인데도 의원마다 '아랫사람' 대하기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싶었다.

"의원 운전기사는 공무원이므로 일과시간만 일해야"

우선 L의원은 휴대폰 전화도 직접 받았다. 아침에 '야구르트'와 '바나나우유'는 물론 요구르트나 우유를 찾지도 않았다. 우유가 흰색이건 노란색이건 가리는 법이 없었다. 양치질할 때 넥타이 끝을 잡고 서 있으라고 하는 '존심 상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J비서에게 더욱 더 감격스러운 것은 L의원이 모든 보좌진에게 적용하는 '나인 투 파이브'(9 to 5) 근무원칙을 운전기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한다는 점이다. 운전기사도 엄연히 공무원(국회 사무처 별정직)이므로 일과시간에만 일하면 되지 이른 새벽이나 밤중까지 일을 시켜선 안된다는 것이 L의원의 지론이다. L의원은 평소에도 낮 시간에 공무를 볼 때 말고는 늘 승용차(그랜저XG)를 손수 운전한다.

뿐만 아니라 L의원은 국회에 출근할 때도 손수 운전한다. L의원은 7시에 출근해 국회에서 운동을 하고, J비서는 9시까지 버스를 타고 국회에 출근해 업무를 시작한다. 물론 일과시간에도 사적인 용무일 때는 L의원 본인이 직접 운전한다.

L의원은 1년 전부터 의원실에 주5일제 근무를 도입했다. 주5일 근무는 운전기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당연히 토·일요일에 집중된 지역구 관리 때면 직접 승용차를 몰고 지역구민의 '애경사'를 찾는다.

이 L의원은 바로 4월 9일 밤 음주단속에 걸려 100일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이훈평(李訓平·60·서울 관악갑) 의원이다.

현역 의원이 음주운전으로 적발되기는 처음

이훈평 의원은 요즘 인기가 바닥세인 동교동계 구주류 정치인이다. 게다가 대선 뒤에 이른바 '민주당 살생부'를 처음 작성한 '피투성이' 왕현웅씨를 형사 고발한 민주당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네티즌들이 보기에는 한 마디로 '밥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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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민주당 살생부' 사건과 관련해 윤리위원회 개회를 선언하는 이훈평 윤리위원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 지엄한 윤리위원장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지역구 경찰에 적발되어 100일 면허정지 및 벌금 처분을 받았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더구나 현역 의원이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것은 처음이라니 이 '신기록'은 두고두고 남을 일이다. 그러나 이 '신기록'은 '사건사고' 이상의 정치-사회적 함의(含意)를 담고 있다.

우선, 현역 의원이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것은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어디 적발된 게 처음이겠는가, 국회의원이 음주단속에 적발되어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게 처음일 뿐이지. 또 국회의원들이 운전대를 잡을 일도 드물지만 음주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을 일은 더욱 더 없고 보면, 이런 '사고'는 사실 일어날 일이 별로 없었던 게다.

둘째, 음주단속에 걸린 이훈평 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의원은 이날 저녁 자택에서 400m 떨어진 음식점에서 열린 관악구 봉천동 일대 상가번영회 모임에 참석해 소주 3∼4잔을 마신 뒤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귀가하다가 경찰의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다. 이 의원은 의경의 단속 및 측정에 순순히 응했고 혈중 알코올 농도가 면허정지(0.05 이상∼0.1% 미만)에 해당하는 0.08%로 나오자 인근 관악경찰서로 가 조사를 받고 면허정지 및 벌금 처분을 받았다.

이 의원은 경찰서에서 자신이 지역구 의원임을 알아보기 전까지 국회의원 신분임을 밝히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마침 SBS 카메라기자가 음주운전 관련 특집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단속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그 점을 감안하면 '괜한 말썽'을 우려해 조용히 '처분'만 기다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지역구 행사에 늦게 참석해 운전기사를 기다리게 하기가 미안해 돌려보낸 뒤 집 앞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운전대를 잡았다"는 이 의원의 해명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조정희 보좌관은 "의원께서 술을 가볍게 마신 데다가 마신 장소가 지역구이고 집 근처라서 설령 단속에 걸리더라도 경찰은 다 알기 때문에 별일 있겠냐 싶었던 모양이다"고 해명했다.

'의원 음주운전 사건'은 '꼴불견' 아닌 '신선한 충격'

권노갑계로 분류되는 이훈평 의원은 전형적인 야당 당료 출신이다. 목포상고와 중앙대 신방과를 졸업하고 롯데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낸 후 평민당 시절에 사무처 노동국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역시 동교동계인 김태랑 의원과 함께 야당에서 20년 동안 궂은 일을 하다가 20∼30년만에 '금배지'를 달아 '동교동 특무상사'로 통한다. 이미지를 수단으로 '고공전'을 펼치는 명망 정치인들과 달리 바닥 민심을 알고 '사람 냄새가 나는 정치인'이기에 어쩌면 이런 '신기록'도 세웠을 법하다.

그래서 이번 국회의원 음주운전 사건은 '꼴불견'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훈평 의원의 음주운전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음주운전 사건'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톺아서 그 사건 이면의 함의를 찬찬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100일 동안 면허 없는 이 의원이 운전기사에게 '9 to 5' 근무수칙을 어떻게 적용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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