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도문에서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북한 남양이다. 멀리 북한 초소와 김일성 주석 초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중국에서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 북한으로 입국하고 있다. 국경치고는 언저리가 고즈넉하기 그지 없었다.박도
밤 열차
그들 세 사람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면 내가 소외감을 느꼈고, 우리 조선족 세 사람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면 한족 청년이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면 별다른 얘기가 아닐 테겠지만 한몫 끼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본다는 게 괜히 따돌림을 당한 것 처럼 느껴졌다.
우리 조선족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면 한족 청년도 같은 기분이었을 게다. 우리 동포 세 사람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북한 식량문제로 옮아갔다.
“수령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 재해를 맞아서 일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겁네다. 북조선 전역에 내리 삼년 동안 가뭄 아니면 큰물이 졌기 때문입네다.”
몇 마디 대화밖에 나누지 않았지만, 황씨는 북한에 대하여 무척 호의적으로 말했다.
“우리 친척도 북조선에 사는데 그들이 이따금 찾아와서 처음에는 몇 보퉁이씩 먹을 걸 싸서 보냈습네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 자주 찾아오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되지요.”
김씨는 한국에 대해 다소 호의적으로 말했다.
"하루 빨리 북조선도 개방해야 경제도 발전되고, 또 북미간 평화 협정도 맺어야 합네다. 작은 나라 북조선이 큰 나라 미국과 맞서자니 엄청난 군비가 들어서 북조선 당국이 인민들을 충분히 돌볼 여력이 없는 겁네다.
북조선이 미국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경제력을 회복한 다음 북과 남이 외세를 물리치고 대등한 립장에서 통일해야지요.”
황씨는 북한 주민의 굶주림이 자연 재해와 막대한 군비 때문이라고 힘써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통일의 방법까지 얘기했다.
“사회주의는 욕심이 없다보니 발전이 너무 느려요. 이태 전에까지는 서울에 오가며 장사를 해서 괜찮았는데 요즘은 서울 가기가 하늘에 별따기야요.”
김씨는 서울을 동경하는 듯했다. 남편은 연길의 아무개 빈관에서 복무원으로 있으며, 자기는 장춘을 오가며 보따리 옷 장사를 한다고 했다.
연변 조선족 대부분은 먹고 입는 데는 큰 걱정이 없으나 자녀 교육비와 문화 생활비에 부족함을 느낀다면서 “여기 사람들은 외국에서 돈을 벌어와야 큰 부자가 된다”고 했다.
내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무슨 교육비냐고 의문을 말하자, 최근에는 여기서도 교육비 부담이 점차 늘어나고 있고, 남보다 자식을 잘 가르치려면 가욋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중국이 개방된 후, 이곳 농촌 총각들이 장가가기 한결 어려워졌어요. 반반한 처녀들은 도시로, 남조선이나 일본으로 많이 나갔시요.”
김씨는 배시시 웃으면서 자기도 처녀였다면, 아마 남조선이나 일본으로 갔을 거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이미 겪었던, 현재도 겪고 있는 농촌 총각 결혼 홍역을 이곳에서는 이제 한창 겪는 듯했다.
“조선족과 중국인과의 갈등은 없습니까?”
내가 황씨에게 물었다.
“전혀 갈등이 없습네다. 한족들은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는 별로 끼여들지 않습네다. 또 중국 중앙정부 당국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조선족도 자기네 인민으로 인정하고 자치주까지 만들어줬습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