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오셨습네까? 반갑습니다

항일유적답사기 (9) - 연길로 가는 밤 열차Ⅰ

등록 2003.04.30 21:15수정 2003.05.0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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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가도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지는 아득하기만 한 만주 벌판. 이육사의 <광야> 시구대로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 그대로였다.
가도가도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지는 아득하기만 한 만주 벌판. 이육사의 <광야> 시구대로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 그대로였다.박도
조선족 동포

장춘역 대합실은 여름 휴가철 탓인지 초만원이었다. 역 광장까지 줄이 늘어섰다. 김 선생은 입장료를 따로 내는 2층 일등 대합실로 안내했다.


이곳도 많은 승객들로 붐볐지만 그래도 의자에는 빈자리도 더러 있었고, 대합실 한 쪽에는 텔레비전도 설치돼 있었다. 이곳에서는 일반 대합실 손님보다 먼저 개찰을 해 주었다.

돈은 사람을 귀하게, 편하게 해 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도 돈이 이처럼 위력을 발휘하니 온 세상사람들이 대부분 돈 앞에 무릎을 꿇나 보다.

지구촌 전체가 개도 물고 가지 않는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심지어 전쟁까지 하는 등 일대 몸살을 앓고 있다.

장춘-도문(圖們)간 야간 열차 승객은 대부분 장거리 손님으로 연길-도문에 사는 조선족이 많고 도문에서 국경을 넘어가는 북한 동포가 더러 있다고 한다.

나는 어쩌면 열차 안에서 북한 동포를 자연스레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가졌다. 행여 북한 동포를 만난다면 그에게 북한의 실상을 듣고 싶었고, 서로 마음을 열고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문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드넓은 동아시아 만주 대륙을 밤 열차로 달린다. 몸은 좀 고달플지라도 얼마나 낭만적인가? 거기다가 마음이 통하는 승객을 만나서 밤새워 정담을 나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이 어디 있을까?

그 승객이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그야말로 비단에다 수놓은 격일 게다. 여행은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하고, 또 쉽게 사람을 사귀게 한다. 이는 여행이 갖는 묘미다.


여행가들은 좋은 여행의 삼대 요건으로 교통ㆍ날씨ㆍ숙박시설을 꼽는다고 한다. 여기서 교통은 꼭 빠르고 편한 것만은 아닐 게다. 시간이 다소 넉넉하다면 낯선 고장 풍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열차나 버스 편이 오히려 여행의 진수를 맛볼 테다.

각 교통편은 그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어쩌면 여행의 참 맛은 값비싼 호화 여행보다 조금은 고생스러운 여행일 테다. 자전거나 도보여행, 완행열차나 버스여행으로 발길 닿는 대로 낯선 나라의 뒷골목과 시골마을을 누비면서 값싼 그 나라 고유 음식을 맛보고 덧칠하지 않은 그네들의 인정에 동화되는 게 더 멋진 여행이리라.

하지만 이번 답사 여행은 짧은 기간에 넓은 중국 대륙을 누비는 빡빡한 여정이기에 주로 비행기나 승용차로 짜졌다. 하지만 창춘에서 연길행은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야간 열차를 탔다. 두 분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로서는 열차 여행이 무척 다행이었다.

일등 대합실을 거쳐 플랫폼에 나가자 밤 9시에 출발하는 도문행 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객실을 20량 정도 이은 긴 열차로 대부분 좌석을 침대로 바꿀 수 있는 객실이었다.

내가 든 객실은 특실인 탓으로 1실이 4인용이었는데, 내 좌석만 딴 방이었다. 두 분은 다른 객실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튼 우리말이 통하는 조선족이었으면 좋겠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족(漢族)이라면 하룻밤이지만 얼마나 괴로우랴.

일반 대합실은 개찰이 늦은 탓으로, 한참 후에야 40대 초쯤 되었을 한 여자 승객이 들어왔다. 꽤 미인이었다. 막상 미인을 만나고 보니 당혹감이 앞섰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동포의 낡은 초가집
연변조선족 자치주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동포의 낡은 초가집박도
중국 땅에서는 외모로는 한족과 조선족이 구별되지 않았다. 서로 어색한 목례만 나눴을 뿐이었다. 초면에 주책없이 말을 늘어놓는 일은 실없는 사람으로 보일 게다.

나는 그를 마주 쳐다보기가 민망하여 차라도 마시려고 보온병을 들자, 그가 물 컵을 찾아주면서 반기는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
“서울에서 오셨습네까? 반갑습니다”

반가운 우리말이었다. 낯설고도 액센트가 강한 북한 말씨였다.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차림새가 서울에서 유람오신 분 같습니다.”
‘유람’이란 말이 생소했다. 관광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조선족이라서 반갑습니다. ”
“어디까지 가십니까?”
“연길까지 갑니다.”
“저도 연길까지 갑니다. 그럼, 백두산 유람 오셨군요.”
“네, 백두산도 오를 예정이지만, 동북 일대 여기저기를 둘러보러 왔습니다.”
그는 연길에 사는 조선족 김씨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새 30대 후반쯤의 한 남자 승객이 들어왔다. 그는 한족이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과 중국말로 대화를 나눴다. 잠시 후, 30대 초반쯤의 한 남자 승객이 들어왔다. 다행히 조선족 청년이었다.

그는 연길에 있는 연변대학 부설 농업연구소에 복무(근무)하는 황씨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명함까지 건넸다. 그 역시 강한 액센트의 북한 말씨였다. 이곳에서 만난 조선족 대부분은 북한 말씨를 썼다. 동북지방은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깝고, 그동안 북한과는 교류가 있은 탓인가 보다.

내가 끼어들면 조선족 세 사람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눴고, 내가 빠지면 그들 세 사람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은 대부분 우리말과 중국말 모두가 유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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