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문명의 공존은 가능한가

<유라시아 여행기> 터키 이스탄불 (1)

등록 2003.05.11 02:29수정 2003.05.1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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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문명의 공존은 가능한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스탄불에서 찾을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아시아대륙에 걸쳐있는 이곳은 동서고금이 동시에 존재하는 문명의 보고이다. 히타이트, 아시리아와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문화, 초기 기독교 문화, 비잔틴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길 하나 혹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 이들 문명의 흔적들은 50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전경
성 소피아 성당 전경홍경선
자연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카파도키아'를 떠난 야간버스는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하루동안의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눈이 감기질 않는다. 동서문명의 교차점이자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이스탄불로 향한다는 설렘때문일까.

터키는 히타히트,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의 장구한 역사와 문명을 계승하고 있는 모자이크 나라이다. 실제로 그동안 지나쳤던 에페스, 파묵깔레(히에라폴리스), 셀주크, 카파도키아 등지에서 많은 고대유적들을 접하면서 역사의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겨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향하고 있는 이스탄불은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던만큼 풍부한 볼거리와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학자 토인비마져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칭송하지 않았던가.

화려한 이슬람 제단
화려한 이슬람 제단홍경선
이렇게 이스탄불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잠마져 못이루고 있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나니 어느덧 날이 밝았다. 차창 밖으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바로 유럽과 아시아대륙 사이에 자리잡은 보스포서스 해협(BOSPHORUS STRAITS)이었다.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과거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고 하니 주요 국제무역항으로써의 모습은 여전한가보다. 버스는 두 대륙을 잇고 있는 왕복 6차선의 파티흐 술탄 메메드 대교(The Fatih Sultan Mehmed Bridge)를 건너기 시작했다. 드디어 실크로드의 종착지에 들어선 것이다.


차창 밖의 푸른 바다위로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슬며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수면위로 드러난 육지에는 거대한 모스크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자태를 드러낸체 하늘높이 뻗어있는 뾰족한 첨탑들은 이슬람 국가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고 있는 듯 했다. 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현대문명의 자동차들이 경적소리를 내자 버스안의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창밖에 펼쳐진 뜻밖의 풍경에 놀라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다. 자고 일어나니 또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자 아침의 고요함은 금새 사라져 버렸다. 한밤의 잠에서 깨어난 공존의 도시 이스탄불은 그렇게 멋들어진 모습으로 쾡한 눈의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푼 후 샤워를 했다. 시원한 물줄기가 온몸을 적셔오자 지난 밤의 피로가 사라지는 듯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으로 이스탄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공존하는 역사의 장 '이스탄불'의 향기는 역사지구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 향긋한 문명의 향기에 이끌리는 발걸음을 따라가니 붉은 건물위로 거대한 둥근 돔이 나타났다. 이스탄불 역사의 산증인이자 그리스정교의 총본산이며 비잔틴 건축의 압권으로 손꼽히는 '성 소피아 성당'이었다.


성스러운 지혜란 뜻을 지닌 '성 소피아 성당'은 찬란했던 비잔틴 제국 문명의 결정체였다.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그리스정교의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지어지기 시작한 이 건물은 이후 AD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성되었다. 100명의 감독관과 1만명의 공인이 동원되어 완성한 이 건물은 당시만에도 역대 최고의 아름다움과 최대의 크기를 자랑했다. 지금도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의 내부
성 소피아 성당의 내부홍경선
길이 81 m, 너비 70 m의 풍부한 내부 공간과 지상 56m 높이에 떠있는 직경 32m의 거대한 돔은 마치 작은 산을 방불케한다. 더구나 이 거대한 돔을 단 한개의 받침기둥도 없이 지어놓았다고 하니 불가사의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당에 대해 AD 537년 12월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솔로몬과 비교하며 '오! 솔로몬이여! 내가 드디어 그대를 능가했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토록 웅장했던 그리스정교의 총본산은 천년제국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해 함락당한 후 '아야 소피아'라 불리우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것이다. 그 후 500년동안 이교도 치하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던 성당은 1935년 터키의 아버지 '케말 파샤'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고보면 537년에 완성되어 150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성당의 역할을 바꿔온 인물들은 역대 최고의 군주였다. 동로마제국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성된 후 역시 마찬가지로 오스만제국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술탄 메메드2세에 의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터키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케말파샤에 의해 박물관으로 또 한번 탈바꿈하게 되니 성당의 역사는 곧 비잔틴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터키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있는 화려한 이슬람 제단이 눈에 띈다. 그윽한 분위기 속에 노란 조명을 살짝 비추고 있는 제단은 황금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금빛으로 물든 직사각형 모양의 제단에는 코란의 글귀처럼 생긴 글씨가 새겨진 녹색 현판이 달려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선 코란을 무늬로 새기는 것을 금한다고 한다.

낯설은 이슬람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
낯설은 이슬람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홍경선
제단 위에는 화려한 이슬람문양이 새겨진 40여개의 거대한 스태인드글라스가 빛을 내뿜고 있다. 여기서 반사되는 빛은 어두운 실내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시선을 올리다보면 돔 천장의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나타난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데 마치 현세에 나타난 듯이 그림 주변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성당의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최고급 대리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특히 1층 벽에는 여러 가지 화려한 문양과 장식들이 새겨져 있어 이슬람 사원의 특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각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회랑마다 그려져있는 갖가지 문양들은 미술사에 있어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황금빛 모자이크로 꾸며진 통로의 천장에는 많은 십자가 모양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십자가의 모양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십자가 위로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덫칠되어있기 때문이다. 둥근 꽃무늬 접시모양의 테두리 안에 십자가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비추고 있어 오히려 더욱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 소피아 성당의 십자가 그림
성 소피아 성당의 십자가 그림홍경선
이러한 특징은 성당 전체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각 기둥들마다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에는 성경 속의 천사 혹은 성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슬람 장식 속에서 은근히 피어나는 그리스정교의 꽃이라고나 할까. 금박을 두른 이슬람장식보다는 화려하진 않지만 다 벗겨진 희미한 상태에서 은근히 뿜어져 나오는 예술성은 비잔틴문명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는 듯 하다.

비잔틴과 이슬람의 조우. 어색한 할 것만 같은 두 문명의 만남은 이렇듯 아라베스크의 화려한 장식과 장엄한 기독교 성화들이 한데 어우러져 찬란한 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는 오스만제국의 정복자 술탄 메메드 2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이곳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을 당시 그는 찬란한 비잔틴 문명을 파괴가 아닌 포용으로 품에 안았다. 당시 이슬람의 관례는 적군의 성을 함락시키면 통상적으로 3일간의 약탈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마자 곧바로 소피아 성당으로 말을 몰아 성당의 파괴를 일체 금했다고 한다. 타문명과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으로 공존의 길을 걸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성당내의 모든 성화와 모자이크들을 그대로 둔체 그 위에 이슬람 문양을 덫칠하여 모스크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는 이슬람의 전통으로써 포교라는 명목아래 점령하는 곳마다 무차별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던 기독교 군대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성당 내부의 아라베스크 문양
성당 내부의 아라베스크 문양홍경선
그 후 500여년이 흐른 1935년, 그때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던 소피아 성당이 박물관으로 개조되면서 두 문명의 공존의 흔적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벽면의 칠을 벗겨내자 그 안에서 그리스정교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성화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한 사람의 관용이 멸망한 문명의 흔적을 지켜주었고, 역사의 장에서 끄집어내어 후손들 모두가 감상 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문화유산 지킴이가 아닌가 싶다.

2층에는 갤러리가 있는데 이곳엔 성 소피아 성당의 하이라이트인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다. 입구 서쪽의 대리석으로 된 천국의 문 안에 있는 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지는데 중앙의 예수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이 각각 좌우로 서있다.

그렇게 1층과 2층에 걸쳐 펼쳐진 관용과 공존의 세계에서 한참을 헤맨 후 출구로 향했다. 저멀리 하얀 빛이 들어오는 출구에 가까워지자 위쪽 벽면에서 거의 완벽한 모자이크가 나타났다. 역시나 화려한 금판에 세명의 역사적 인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뒤편의 모자이크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었다. 출구로 들어오면 바로 정면 위에 보이는 한 개의 모자이크. 이는 지금까지 보고 느꼈던 성 소피아 성당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었다.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왼쪽에 교회를 바치고 있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오른쪽에 도시를 바치고 있는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모습이 그려진 모자이크다.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그동안 온갖 탄압과 박해를 받아왔던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이는 결국 기도교화 된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후 5년 뒤인 AD 330년 5월 11일. 그는 히포드럼(마차 경기장)에서 도시의 완공식을 갖고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한 후 천도한다.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도시를 바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수가 있다.

교회를 바치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역시 마찬가지다. 밖으로는 반달, 동고트, 서고트왕국 등 게르만족을 격퇴하며 로마의 옛 영토를 회복함은 물론 안으로는 로마법대전을 편찬하며 내실을 다졌던 역대 동로마제국 최고의 황제가 아닌가. 그의 위대한 업적은 성 소피아 성당을 완공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되었고 그의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모자이크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성당 출구쪽의 모자이크
성당 출구쪽의 모자이크
이렇듯 동로마제국은 1453년 5월 39일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기독교 국가로서 찬란했던 비잔틴 문명을 일구어내며 천년의 역사를 이끌어왔던 것이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두 인물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그들이 꿈꿔온 제국의 번영과 종교적 열망은 이처럼 한편의 모자이크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어두운 실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성 소피아 성당. 중앙의 거대한 돔을 여러개의 보조 돔들이 둘러싸고 있고, 또 그 주변을 네 개의 첨탑이 에워싸고 있다. 비잔틴 양식에 이슬람 양식이 첨가된 새로운 이 양식은 훗날 이슬람 건축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의 모습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곳에 자기와 다른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의 도시 이스탄불로 바뀌었지만 두 문명은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고 결국 동서양이 조화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제 이곳은 기독교의 성지순례지이자 이슬람의 모스크로써 두 종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함은 물론 관용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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