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30

소녀는 죽어도 못 가요! (5)

등록 2003.05.12 13:08수정 2003.05.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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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타주님 모든 것은 오해입니다. 그분 어르신은 간세가 아닙니다. 그분은 해동 땅에 있는 조선에서 온 무관입니다. 소생과는 오래 전에 안면이 있어…"
"시끄럽다. 어디서 감히…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느냐? 놈은 제왕비를 지닌 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무언가를 캐던 놈이다."

"예에…? 그걸 어찌…?"
"흥! 천하를 제패한 본성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더냐? 놈의 행적은 오래 전부터 보고되어 있었다. 본성에 있었으면서도 설마 무면호리(無面狐狸)를 모른다고는 않겠지?"


"무면호리요? 본성의 기밀을 염탐하고는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설마! 설마 어르신이…?"
"크흐흐! 모르는 척하는 연기가 일품이구나. 그 정도면 원곡(元曲 :중국 연극인 경극(京劇)의 전신)에 출연해도 되겠다."

"아, 아닙니다. 그 어르신이 무면호리였다니요? 소생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회옥의 안색 역시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졌다. 조관걸의 정체가 무면호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림천자성에는 반드시 찾아 죽여야 할 인물들의 이름과 명호가 기록된 명단이 있다. 이를 무림살생부(武林殺生簿)라 부르는데 거기 기록된 명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면호리이다.

진면목을 알 수 없어 무면(無面)이라는 뜻과 워낙 행동이 신출귀몰하며 여우처럼 약삭빠르기에 호리(狐狸)라는 글자를 합쳐 만든 외호이다. 그의 행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삼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성주인 철기린은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제왕비를 하사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두 살이었다.

당시 그는 제왕비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너무도 뛰어난 물건이기에 누군가가 훔쳐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여 자신만 아는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었다.


성장한 이후 자신을 상징할 마땅한 신물을 찾던 그는 깊숙이 감춰두었던 제왕비를 상기하게 되었다.

어린 때와는 달리 무공도 강해졌지만 음모와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강호이니 안전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천하제일장공인 묘수신장(妙手神匠) 유태지(劉太智)를 불러들였다.

진품이 아닌 모조품이라면 지니고 다니다가 잊어버리거나 도난 당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모두 스물네 자루의 가짜 제왕비가 탄생되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철기린은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똑같은지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를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묘수신장이 물러간 이후 철기린은 진품을 잘 보관하고 대신 모조품을 지니고 다녔다.

그러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자를 만나 그것 가운데 하나를 주었다. 장차 대권을 물려받으면 요직(要職)에 등용하겠다는 의미에서 하사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막강한 권력과 부귀영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처음엔 그럴 의도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제왕비를 받은 자는 철기린의 명이라면 끓는 기름 속으로 뛰어 들라고 하면 흔쾌히 그렇게 할 정도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회옥이 제왕비를 받은 것도 같은 의미였다. 비룡을 길들인 것도 그렇지만 말을 다루는데 있어 천하에 그만한 인재가 없다 판단하였기에 하사한 것이다.

성현들이 말하길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였다.

철기린은 자신이 성주가 되면 무림천자성의 체제를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현재 팔 당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이십사 당으로 세분화 할 생각이었다. 그때 제왕비를 하사 받은 이십사 인은 각당의 당주가 될 것이다. 이때 이회옥을 철마당주에 앉힐 생각이었다.

철마당에서 하는 일은 좋은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현재의 철마당주인 뇌흔의 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년 전 일천이백여 마리에 이르는 대완구들을 끌고 온 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다.

그 이후에 세운 공은 거의 없다. 아니 공은커녕 결정적인 실수를 계속하여 범하고 있다. 대완구들의 수효가 더 이상 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리 교접을 시켜도 새끼를 배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숫자가 늘고 싶어도 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회옥을 당주 자리에 앉히면 금방 새끼들을 줄줄 낳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하는 것을 보면 대완구의 특성에 대하여 아주 잘 아는 듯하였던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림천자성의 기동력이 좋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철마당주로 제격이라 판단하였기에 제왕비를 하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받은 이회옥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분타주가 자신을 상전 대접하듯 한다는 것만 알뿐이었다.

얼마 전, 철기린은 묘수신장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제 얼마 후면 정식으로 차기 성주에 임명되고 동시에 성조검을 하사받을 터인데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될까 싶어서였다.

차기성주 신물인 그것을 만든 사람은 바로 묘수신장이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모조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가짜 성조검이 아우인 무언공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나중에라도 엄청난 혼란이 생길 것 같아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를 죽이라 명을 내린 것이다. 결국 그의 뜻대로 묘수신장은 죽었고, 그가 죽은 직후 조관걸이 찾아갔던 것이다.

조관걸이 무면호리라는 외호를 얻게 된 것은 제왕비를 하사받은 자들을 모두 찾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무림천자성에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한번도 같은 얼굴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용약을 사용하여 얼굴만 바꾼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서생으로, 때로는 장사꾼으로, 때로는 거지가 되어 접근하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는 바람에 정체가 발각난 것이다.

그것은 제왕비에 남은 흔적이었다. 조관걸은 왼손 새끼손가락 끝 마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안쪽으로 심하게 휘어져 있었다.

몰래 제왕비를 살펴보고 제 자리에 잘 둔다고 하였지만 도신에 남은 흔적을 지우는 것은 그만 간과하고 말았다.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이리저리 살피느라 손자국이 남게된 것이다.

처음엔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일곱 번째로 제왕비를 하사받은 자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림을 그려둔 바 있었다.

이후에도 같은 일이 발생되자 은밀한 명이 내려졌다. 그 결과 무면호리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무림천자성에서는 차기성주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할 동량들에게 접근한 그에게 결코 좋은 의도가 없다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살생부에 그의 명호를 올렸다. 반드시 잡아 이유를 묻고 상황에 따라 참형에 처해 증거인멸을 하려는 것이다.

살생부에 적인 사람은 거처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만일 거처가 일정했다면 굳이 살생부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은밀히 찾아가 죽여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을 찾아내거나 죽이는 자에게는 일 계급 특진이라는 상이 주어진다. 하여 무림천자성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살생부에 기록된 사람들의 명호와 특징 등을 줄줄 외우고 다닌다.

그런데 조관걸이 바로 살생부에 명호가 올려진 무면호리라고 하니 대경실색한 것이다. 사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분타주의 예리한 관찰력 덕분이었다.

그는 무림천자성 사람들을 출입 금지시킨 다향루를 어떻게 하면 골탕을 먹일까를 생각하였다.

일타홍의 부친이 선무곡의 호법이기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분타주 입장에서는 아군이라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고심하던 중 낯선 인물인 조관걸과 그의 딸이 다향루의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 그가 철룡화존이 전쟁광이라면서 욕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즉각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없는 꼬투리라도 만들어서 자신이 당한 치욕에 대한 분풀이를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던 차에 분타주 집무실 밖에서 마차에 치어 죽은 두 소녀에 대한 항의 집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였던 분타주는 하나의 계략을 꾸몄다. 조관걸이 항의 집회를 벌이는 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인 것처럼 꾸미려 한 것이다.

북선무곡, 즉 무림천자성의 뜻에 늘 반기를 드는 주석교에서 파견한 간세로 몰면 여러 가지 이익을 볼 수 있다 판단하였다.

첫째는 항의 집회를 더 이상 개최하지 못하게 하라는 압력을 더욱 강하게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그를 세뇌시켜 주석교에서 마치 어떤 일을 벌이려 하는 것처럼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셋째, 그렇지 않아도 최근 공을 못 세워 영 면목이 없던 터인데 이렇게 해서라도 면을 세우고 싶어서였다.

어찌 되었건 모든 것은 조관걸이 자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문을 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회옥이 오자 서둘러 끝낸 것은 자신의 의도를 알아챌까 싶어서였다.

이회옥을 보낸 후 지하뇌옥, 그러니까 비공식적인 뇌옥으로 간 분타주는 본격적인 고문을 시작하였다.

매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손톱과 발톱 밑에 굵은 침을 박고, 살가죽을 벗겨낸 뒤 소금을 뿌리거나, 코나 발뒤꿈치를 베어 낼 생각이었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 하나 자를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제아무리 강골이라 할지라도 없던 사실도 불게 될 것이다. 만일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무림지옥갱에서만 사용된다는 피거형에 처할 생각이었다. 하여 우선 맛보기로 주리를 틀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있어 형을 멈추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바람같이 달려갔다 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무면호리의 손자국을 그린 그림이 들려 있었다.

예상대로 조관걸의 왼손 새끼손가락과 그것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드디어 무면호리를 생포한 것이다. 덕분에 고문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를 총단으로 압송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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