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자!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낭자는 여기 있는 놈들 모두에게 능욕 당할 수도 있소. 뿐만 아니라 어르신 역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그래도 좋다면 남으시오."
"오호! 그래요…? 누굴 속이시려고… 그래도 믿을 수 없어요."
조연희의 반응에 이회옥은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 느꼈다. 그녀를 능욕하고 남느냐, 아니면 혼자서라도 떠나느냐였다. 잠시 인상을 굳힌 이회옥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남으시오. 소생은 분명 진실을 전했소. 믿지 않은 것은 낭자이오. 따라서 혼자 남았다가 무슨 일을 당하던 절대 소생을 원망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말을 마친 이회옥은 조연희가 보건 말건 황급히 경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각 밖으로 향하였다. 이 모습은 너무도 매몰차게 보였다.
따라서 홀로 남겨진 조연희는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부친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고, 일생을 의탁해야 할 사내가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밖에서 이회옥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본좌는 질풍과 노도를 전속력으로 몰 것이오. 따라서 그대들은 따라올 필요가 없소. 앞으로 두 시진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니 푹 쉬었다 그때 오시오."
"순찰, 속하들은 질풍과 노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어디를 가든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후후! 설마 전속력을 질주하는 질풍노도를 경공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오?"
"그, 그거야…"
이 대목에서 정의수호대원들은 할말이 없었다. 질풍과 노도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준구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놈들이다. 따라서 두 시진이면 이백 리 이상을 달릴 것이다.
그걸 따라갔다 온다는 것은 사실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래도 억지로 갔다 온다면 숨은 턱에 찰 것이고,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릴 것이다. 게다가 두 다리는 며칠 동안 꼼짝도 못할 만큼 알이 배길 것이다.
달밤의 체조도 이런 체조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따라나서지 말라는 말에 강하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 때문인가?"
"그, 그렇습니다. 순찰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 선무곡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여 공무(公務)가 아닌 한 술시(戌時) 이후에는 외출을 금하도록 명이 내려진 상황입니다."
"본좌도 아네. 그럼 하나만 물어보세. 만일 본좌가 질풍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그거야…"
이 대목에서 정의수호대원은 또 할말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바람처럼 달리는 데 어떻게 공격을 가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네들은 이만 가서 마작이나 하게. 마작을 하라는 이유는 앞으로 두 시진 후에나 돌아오는데 자네들이 자고 있으면 안 되겠기에 내리는 명이네. 알겠는가?"
"핫! 존명!"
누가 한밤중에 말 꽁무니나 따라 달리고 싶겠는가?
만일 중대한 임무가 있어 이름을 드날릴 임무라면 신이 나서라도 가겠지만 말을 지키는 것은 잘해봐야 본전인 임무이다.
그렇기에 선무분타 소속 정의수호대원 가운데 가장 말번인 넷이 차출된 것이 아니던가!
사실 마구간에 배속되지만 않았다면 앞으로 최하 일년 동안은 마작 패를 만져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마음놓고 마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배 정의수호대원들의 눈치를 살펴가다가 그들이 기분 괜찮을 때에나 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냄새난다고 아무도 오지 않는 마구간에 배속되었고, 직속상관이래 봐야 이회옥 하나뿐이기에 말번이지만 매일 밤 마음놓고 마작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사실 원대한 포부를 안고 정의수호대원이 되는 관문을 돌파했건만 기껏 말이나 지키라고 했을 때에는 맥이 탁 풀렸었다.
그나마 수백, 수천 마리나 된다면 기분이라도 달랐을 것이다. 헌데 사람은 넷인데 말은 달랑 두 마리뿐이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으면 이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작을 할 수 있었기에 그런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놈의 마작이라는 것이 처음 배울 때에는 무지하게 복잡하지만 일단 한번 맛을 들여놓고 나면 마치 아부용(阿芙蓉 :아편) 같아서 좀처럼 발을 빼기 힘든 것이다.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마작판으로 보이게 될 정도이다. 저잣거리에서도 흔히들 하는데 어떤 객잔에서는 장방과 점소이가 마작을 하다 종종 주인이 바뀌기도 한다고 한다.
정의수호대원은 이회옥의 마음이 혹시 변할까 싶었다. 오늘은 패가 어찌나 잘 들어오는지 원하는 대로 조패가 되고, 방이 서면 바로 판을 끝내곤 하였다. 그것도 큰판으로만 내리 여섯 판이나 먹었다. 그 가운데 한 판은 평생토록 오로지 마작만 하는 사람도 한 판 뜰까 말까하다는 구련보등(九聯寶登)이었다.
덕분에 지난 한달 동안 읽었던 은자를 한번에 벌충하였다. 노름꾼들이 흔히 하는 말로 오늘은 노가 나는 날이다. 하여 한참 기분이 좋던 차에 이회옥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사시나무 떨듯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늘 끝발이 좋았는데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다시 마직을 해도 좋다고 하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 다녀오십시오. 속하들은 순찰이 오실 때까지 졸지 않기 위하여 마작을 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오늘 제일 많은 은자를 잃은 대원이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불타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앞으로 두 시진 이내에 잃었던 은자를 모두 찾는 것은 물론 몽땅 따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좋네, 그럼 다녀올 터이니 어서들 가게."
"존명!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저어, 어서 다녀오시지요."
정의수호대원들은 이회옥이 왜 안가고 서 있는지 답답했다. 한시바삐 마작판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아, 참! 잊고 나온 것이 있으니 자네들은 그냥 가게."
"존명! 그럼 속하들은 이마… 야, 어서 가자!"
"그래! 어서 가서!"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대원들을 보던 이회옥은 전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보려는 듯 고개를 빼꼼하게 내민 조연희가 있었다.
"낭자, 지금 안 가면 천추의 한을 남길 수 있소. 어서 오시오."
"싫어요. 아버님을 구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안나갈 거예요."
"이런 고집하고는…! 에이, 관듭시다."
이회옥은 상황도 모른 채 고집만 피우는 조연희가 밉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낳아준 부모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걸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다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집만 피우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여 내심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공자님! 누가 와요."
"허억! 벌써…?"
"호오! 이게 누구신가? 잘 나가는 순찰 나으리께서 이 밤중에 어찌 말을 타겠다고 하셨을까? 그것도 혼자서 두 마리를…"
"아니? 분타주께서 어떻게 여길…!"
"왜? 본좌는 여기에 오면 안 되는가? 크흐흐! 소성주님의 총애를 받는다기에 설마 했는데… 크흐흐!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겠군. 안 그래?"
"아, 아닙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그분 어르신은 간세도 아니고, 소생 역시 한 패거리가 아닙니다."
"크흐흐! 그분…? 간세…? 방금 본좌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크흐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것을 한 패거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안 그래?"
"아, 아닙니다. 그, 그건… 그건 조금 전에 소생이 분타주 집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들어서 알게 된…"
"호오! 그러니까 본좌의 집무실에 와서 은밀하게 엿듣고 갔다는 이야기이지? 분타의 비밀을 탐지하려고?"
"아, 아닙니다. 그, 그건 아닙니다."
이회옥은 자꾸 꼬이기만 하는 상황이 답답하였다. 그러는 사이 이십여 정의수호대원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각과 전각 사이의 모든 통로는 물론 지붕에도 배치되어 있었다.
한편 허보도는 대원들에게 맡겨놓고 있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직접 나섰다. 하여 이토록 빨리 당도한 것이다. 허보도는 곁에 있던 대원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사실이었군. 좋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저기 저 계집을 마음껏 취해도 좋다. 그 이후에는 동료들에게 주도록!"
"핫! 감사합니다! 분타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핫핫! 좋아, 절대 잊지 말아라. 알았지? 하하하! 하하하하!"
"존명!"
당황하고 있는 이회옥을 본 허보도는 다 잡은 고기라는 듯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잘 들어라! 놈을 절대 죽이면 안 된다. 놈이 순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배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놈을 족쳐 배후를 캐야 하니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존명!"
"하하! 좋다. 그럼 시작해라."
"존명!"
채챙! 채채채채챙!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정의수호대원들이 병장기를 뽑아들자 장내는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면서 병장기에서 뿜어지는 예기(銳氣)로 주변의 공기가 냉각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조연희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확연히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회옥의 말을 진작에 따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 오늘 밤 능욕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입술을 꼭 다물었던 그녀는 품에 있던 은장도를 뽑아 들었다. 더럽혀지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런 관련도 없던 이회옥이 졸지에 간세와 한 패로 몰려 목숨을 잃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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