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은 사랑으로 가는 길인가?

전쟁과 평화 후 망신이 찾아오다

등록 2003.05.26 07:49수정 2003.05.2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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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이 어느 때였습니까? 2년 전 꼭 이맘때였습니다. 며칠째 황사가 온통 하늘을 뒤엎고 숨쉬기도 곤란할 정도로 우울한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며칠째 아침조깅을 쉬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한 게 안되겠다 싶어 아침 달리기에 나섰습니다. 아침 안개와 황사가 겹쳐서 시야는 불투명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몸에 달라붙어 칙칙했습니다.


황사 때문에 호흡을 코로만 하려고 하니 숨이 찼습니다. '이런 날은 집에서 쉬는 것이 좋았을 텐데 괜히 나왔다'하면서 막 인사리 반환점을 돌아서는 순간, 눈앞이 아찔한 게 둔기에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아스팔트 위에 나가떨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누가 길 옆에 트럭을 세워놓았는데 안개와 황사 때문에 발 밑만 보고 달리다 트럭 백미러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던 것입니다. 공연히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어떤 놈이 차를 여기에 세워 놓았단 말야…!"

박철
투덜거리며 10km 조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큰 거울 앞에 서서 좀 전에 부딪힌 이마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른쪽 눈썹 위로 나뭇가지에 긁힌 것처럼 작은 상처가 나있었습니다. 아내보고 방금 전 트럭 백미러에 부딪친 얘기를 대충하고 소독약을 좀 갖고 오라고 했더니, 아내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싱크대 앞에서 자기 할 일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소독약을 갖고 오라고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아프냐?' '큰일 날 뻔했네!'라며 그냥 빈말로라도 위로 한마디쯤 할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게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내 말이 안 들려? 남편이 다쳤다는데 눈길 한번 안주고, 소독약 좀 갖다 달라고 했더니 들은 척 만 척이야!"

박철
이미 제동장치가 고장 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아내는


"아침부터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래요? 달리기 좀 한다고 그렇게 유난 떨 것까지 없잖아."
"그래 당신은 내 이마 다친 것 안 보여?"
"아까 보았잖아, 상처가 별 거 아니던데 뭘! 상처를 놔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가만 있었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가 잔뜩 난 남편에게 정공법으로 나오다니. 이래서 부부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다 시시콜콜 그걸 옮겨 적을 수도 없고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싸움의 주제는 아내의 잦은 외출에 대한 나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 무슨 여자가 그렇게 돌아다녀? 가정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어? 이 세상에 밥하고 빨래하고 애들 키우는 것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단 말이야? 능력을 꼭 밖에 나가서 계발할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서 계발해 봐!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여자가 밖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박철
아내의 수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가 밥하고 빨래나 하고 설거지나 하는 파출부로 밖에 안보이지? 그럼 진짜 나는 뭐야? 당신은 내가 파출부로 만족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밖에 나가서 뭘 배운다니 그게 불만 아냐? 그럼 결론 뻔한 거잖아! 당신 혼자 애들하고 잘 살아봐!"

싸움의 양상은 점점 격렬해졌습니다. 나의 대포공격에 아내가 소총공격으로 맞받아쳐 격렬한 격전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뭘 배우러 다니게 된 것이 옆 교회 박00 사모의 꼬임 때문이라고 나는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옆 교회 박00 사모를 향해 설마 욕을 하진 않았겠지만, 아내가 집안일에 충실하지 않고 남편에게 무관심하게 된 모든 원인 제공자는 박00 사모였다고, 그리고 박00 사모가 당신을 부추겨서 그런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박00 사모와 무척 친했거든요. 여기다 다 옮길 수는 없고 사생결단으로 싸웠습니다. 막말로 이혼장에 도장 찍자까지 발전했습니다. 아내는 훌쩍거리며 애들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여 씩씩거리며 거실에서 왔다 갔다 했고, 아내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가방을 챙겨 서울 집에 간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용차를 타고 내빼는 것이었습니다.

박철
남자가 사생결단으로 싸웠으면 아내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속 좁게 시시콜콜 아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제동을 걸고 시비나 걸고 한 것이 부끄러워 심한 지괴감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내가 교회승합차를 몰고 배 터로 달려갔습니다. 아내는 바다를 바라보고 망연히 서 있더군요. 내가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말합시다."

그렇게 몇 번이고 내가 치근대자 아내는 승용차에 오르더군요. 승합차를 타고 마누라 꽁무니를 쫒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고구리 저수지 소나무 숲에 가서 차를 세웠습니다. 내가 승합차에서 내려 아내 승용차 조수석에 앉았습니다. 아내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습니다. 황사가 잔뜩 끼였지만 봄날이라 햇볕이 차 안에 가득했습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습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속이 좁은 놈이야. 내가 사과 할게! 내가 아까는 흥분해서 그랬는데 내 본의는 아니었어!"

박철
그러자 한참동안 잠자코 있던 아내가 '맨날 말로만 잘못했다고 그러지 말고 각서를 쓰라'는 겁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일단은 아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자고 생각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각서를 써주었습니다. 각서 내용은 아내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습니다. 각서의 내용은 대충 이랬습니다.

"앞으로 아내 김00에게 차에 관련하여 기름값이라든지, 일체 모든 문제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고 차를 끌고 어디를 가든지 시비 걸지 않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대할 것을 약속합니다. 앞으로 아내 김00이 자기계발을 위해서 활동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가급적 관대하게 대해 줄 것이며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박철
격렬한 싸움 끝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아이들도 아침에 엄마 아빠가 싸웠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격렬하게 싸울 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도 못하고 학교엘 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집안분위기가 평온하자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은빈이는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듯이 애교를 떨고, 애교라고는 모르는 넝쿨이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부부싸움이 끝나면 꼭 돼지고기를 사다 먹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그날 저녁 돼지고기를 사다 구워 먹었습니다.

갑자가 아내가 살갑게 구는데 저 여자가 나랑 싸우던 여자였든가 생각이 될 정도로 그날 하룻동안 있었던 일은 그야말로 '전쟁과 평화' - 한편의 인생드라마였습니다. 격렬한 부부싸움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고 나흘인가 댓새가 지났습니다. 옆 교회 박00 사모가 예고도 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평소에 가끔 우리 집에 불쑥 찾아오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박철
"아니 오신다는 전화도 없이 어쩐 일로 오셨어요?"라고 내가 묻자 박00 사모는 웃으면서, "언제 전화하고 오나요? 그냥 놀러 왔어요!"

하면서 나와 아내를 번갈아보면서 눈치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커피를 한잔 마시더니 박00 사모는 아내에게 할 말이 있다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여자들이란 만나면 무슨 수다가 저리 길까?' 생각하면서 열심히 컴퓨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간간히 안방에서는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요? 박00 사모는 손으로 웃음을 막으면서,
"목사님 잘 놀다 가요. 저 갈게요"하면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박00 사모가 가고 난 다음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박00사모가 왔대? 그리고 날 보고 왜 웃는 거지?"

박철
그랬더니 아내가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한동안 숨이 넘어갈 것 같이 저 혼자 웃어댔습니다. '이 여자가 갑자기 미쳤나?' 내가 자꾸 꼬치꼬치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날, 우리가 격렬하게 싸웠던 날, 박00 사모가 우리 집에 왔다가 우리가 싸우는 내용을 다 듣게 되었다는 겁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내가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며 마구 지껄이는 대목에서 이따금 박00 사모 이름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아내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이 다 박00 사모 꼬임에 빠져서 그런 거라고 다그쳤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여자가 허구헌날 밖으로 나 돌면 살림은 어떻게 하고 애들은 어떻게 키워? 애들을 방목하면 애들이 저절로 자랄 줄 알앗? 박00 사모가 그렇게 부럽단 말야! 그러면 박00 사모와 살지! 보기도 싫어!"

박철
아뿔싸. 이일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할 것이며, 앞으로 박00 사모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어쩌다 아내와 싸우게 되면 꼭 밖을 살피는 일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그 사건이 있고나서 얼마 안지나 박00 사모네가 다른 데로 이사를 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사건을 남에게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건 순전히 박00 사모의 처분에 맡겨둘 뿐입니다. 지금도 박00 사모는 나를 볼 적마다 웃는데, 그때 그 사건을 생각하고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탁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고 애매한 게 표정관리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아내는 요즘도 지갑에 내가 써준 각서를 무슨 소중한 보물지도라도 되는 것처럼 갖고 다닙니다. 어디 한 번 보자고 해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걸 비장의 무기로 써먹을 모양인데 그게 무슨 법적인 효력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써준 증표라고 생각하고 각서에 대해 불만을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이실직고를 하시니 저도 털어놓겠습니다

목사님이 이실직고를 하시니 저도 털어놓겠습니다. 제가 그날 엿들을 라고해서 엿들은 것이 아니라 은빈이 책을 배달해주러 갔었을 겁니다. 제가 도착했을 당시 아마도 크라이막스였나 봅니다. 박00! 이름이 되게 크게 들리는데 제가 어떻게 안 듣겠습니까. 순간 저도 무척 화가 나고 억울하더군요.

사모님도 판단력이 있고 생각이 있는 분인데 내가 꼬신다고 끌려오나, 저렇게 부인의 능력을 모르나, 부인이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한거지. 애들이 커가면서 부인도 무언가 자신을 위해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게 삶의 활력소도 되고 좋은 거 아냐, 왜 맨날 부인을 당신 옆구리에 끼고만 살려고 하지….

집으로 돌아오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더랬지요. 나는 늘 마음속으로 사모님을 좋아하고 나야말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내는데 너무 울타리에 갇힌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지요. 그건 순전히 저의 기준으로 판단한 거겠지만요. 집에 와서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저는 이렇게 정리했지요. 목사님이 사모님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 사랑을 다른 곳에 뺏길까봐 겁내시는구나. 더구나 옆에서 부추기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나, 박00를 미워했다기보다 상황을 미워했겠지.

그리고 목사님이 스스로 자폭하기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사님, 그 각서 얘기 정말 재미있네요. 정말 웃겨요. 이제 사모님의 날개를 달아주시지요.

(이 글은 우리 집 느릿느릿 이야기에 달아놓은 박00 사모의 리플입니다.) / 박00(지금 강화에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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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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