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통일의 깃발을 꽂으리

항일유적답사기 (26) - 백두산 (Ⅱ)

등록 2003.05.27 14:00수정 2003.05.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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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두산 천지 위에 상서로운 운무(雲霧)가 드리웠다.

백두산 천지 위에 상서로운 운무(雲霧)가 드리웠다.


아! 백두산

백두산의 지형적 특징은 절대 높이에 비해 상대 높이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산의 경사가 매우 완만한 점이다.


천지에서 60km 떨어진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백두산이 시작된 듯, 거기서부터 서서히 오르막길이었다. 차를 타고 간 때문인지 몰라도 높은 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경사가 완만했다.

수목 한계선인 정상 직전은 가스래나무가 땅 위를 기듯이 삼림군락을 이뤘다. 고산에다 모진 비바람과 많은 눈 때문일까, 원래 나무의 태생이 그럴까, 아무튼 처음 보는 기묘한 장관이었다.

a 백두산(장백산) 천지 안내판 앞에서 (왼쪽 이항증 씨,  필자)

백두산(장백산) 천지 안내판 앞에서 (왼쪽 이항증 씨, 필자) ⓒ 박도

마침내 '장백산'(長白山: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함)이란 요란한 현판이 달린 누각을 지나자 백두산 정상이 눈 앞에 나타났다.

백두산은 명산답게 예로부터 불함산·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노백산 등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건국 이후부터 백두산으로 통용되고 있음이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백두산 정상은 일 년 중, 두세 달을 빼놓고는 눈에 덮여 있을 뿐 아니라, 2500미터 이상의 산등성이 일대는 바람이 하도 세차서 나무 한 그루도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정상 일대는 바위와 흙도 백색의 화산암이다. 그래서 산봉우리가 마치 머리가 하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서 '백두(白頭)'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국 길림성 정부에서는 관광 수입을 올릴 목적으로 백두산 정상 아래까지 차량이 오를 수 있도록 도로를 닦아 놓았다.


우리 일행은 입장료를 내기 위해 두어 번 차를 세웠을 뿐, 차에 탄 채 그대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등산객들은 산아래 들머리에서 일제 도요다 지프차에 실려 정상 아래까지 오르내렸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을 오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명산을 오를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그 기쁨도 더 큰 법인데, 나 역시 25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을 승용차로 쉽게 오르는 게 백두산 신령님을 모독한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편리함만 추구하는 현대인, 그러한 속성을 최대 이용한 상술로 이제는 산에 대한 경외심이 점차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세상 만사 편한 만큼 그 역작용도 있는 법인데, 이곳 또한 예외는 아닌 듯했다. 여름 휴가가 한창인지라 백두산 정상 언저리에는 등산객과 잡상인들로 붐볐다. 나 또한 그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현대 문명의 중독자가 아닌가.

정상 바로 아래 주차장에서 내리자 잡상인들이 몰려 와서 토산품을 사라고 발길을 막았다. 사진사들이 진을 치고 손님을 불렀다. 성스런 백두산 정상이 장바닥처럼 오염된 듯해서 경건한 분위기가 반감되었다.

"선생님, 대단한 행운입니다."

한 기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천지를 볼 수 있다고 좋아했다.백두산 정상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고 날씨 변덕이 심하다고 한다.

백두산은 북쪽으로 드넓은 아시아 대륙과 바로 잇닿아 있고, 고원 위에 홀로 솟아 있다. 그러므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동해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과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공기가 마주쳐서 정상 일대는 자주 눈이나 비가 많이 내리고 안개와 구름이 껴 있는 날이 많다고 했다.

이런 탓에 등산객들은 여간해서 산의 정상과 천지를 훤히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백두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천경계를 잘 구경하기 위해서는 미리 목욕재계하고 산신에게 제사까지 지냈다고 했다. 솔직히 수륙만리 멀다 않고 예까지 찾아와서 허무한 운무만 보고 떠난다면 얼마나 허망하랴.

a 백두산 천지 위에 운무

백두산 천지 위에 운무

천지.

15시 정각, 마침내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운 천문봉에 올랐다. 눈 아래 펼쳐지는 천지(天池)! 맑디맑다 못해 온통 쪽빛이다.

그 천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40여개의 봉우리들. 장군봉(일명 백두봉·병사봉)·천문봉·관면봉·천활봉·백암봉·용문봉·자하봉·백운봉·지반봉·옥주봉...

수많은 산봉우리와 천지가 절묘한 음양의 조화를 이뤘다. 조물주가 빚은 최대 걸작품이었다. 이리하여 옛 조상들은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모셨나 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의 발원지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달려 두류산, 두타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산이 그 뿌리를 백두산에 두고 있다고 믿어왔으며, 그리하여 백두산은 우리 정신의 고향으로 받들어 모셨다.

나도 풍수지리에는 문외한이지만, 하늘도 당신이 빚은 이 한반도를 한껏 탐내서 당신의 아들 환웅을 이곳으로 내려보내 고조선을 세웠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장군봉(2750미터)은 다행히 우리나라 국경선 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행히도 그곳을 오를 수 없었다. 그 봉우리에다 조국 통일의 깃발을 꽂을 날은 언제일까?

나는 이곳을 오른 후 내도록 황홀감과 안타까운 두 마음으로 지척의 조국 산하를 바라보면서 그 언젠가 살아생전에 내 땅을 밟으며 이곳을 다시 오를 그날을 그렸다. 이런 마음이야 비단 나뿐이랴. 7천만 동포가 한마음일 것이다.

백두산 산마루에 천지가 없다면, 속없는 만두처럼 무미건조한 예사 산에 불과하다. 백두산은 천지가 있음으로 비단에 수놓은 듯, 천하 명산이 되었다.

백두산 사방의 여러 봉우리들은 어미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천지를 둘러싸고 있었고, 천지는 그 맑은 수면에다 사방의 봉우리를 어머니 마음으로 담아 안고 있었다.

창공에 우뚝 솟은 수많은 봉우리와 넘칠 듯한 쪽빛 호수, 이는 절묘한 앙상블이었다. 조물주가 다시 빚어내도 이만한 자연 경관을 만들지 못할 테다.

천지에 내려가서 손이라도 담그면서 한 모금 목이라도 축이고 싶었지만 산등성이에서 천지까지 경사가 심하고, 또 신령한 호수에 속인의 때를 남길 듯해서 눈이 시리도록 마냥 내려다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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