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남자가 맘에 안들면 어떡하냐고

까탈이의 <세계여행> 중국 운남성 루구호 여행기 ②

등록 2003.05.28 10:00수정 2003.05.2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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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김남희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김남희
아침 7시. 침대에 누운 채 일출을 보는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눈을 떴지만 밖은 아직 어둡다. 다시 졸다가 깨어나니 이번에는 환하게 해가 떴다. 결국 게으름으로 인해 일출을 못 보고 만다. 알고 보니 이 숙소는 이곳에 놀러왔다가 눌러앉아 버린 세 명의 내몽고족 친구들이 함께 운영한다.

두 명의 젊은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서로 의지하며 타지를 고향 삼아 살아가는 곳이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니 죽과 속없는 찐빵, 그리고 야채 반찬 두 가지이다.


상하이에서 건축기사로 일하는 중국인 여성 빙빙과 함께 아침을 먹고, 다주이로 출발한다. 날은 너무도 화창하다. 길은 비포장 도로이고, 별다른 높낮이도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두 시간을 걸으니 샤오루쉐이 마을이다. 한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더니 들어오라고 이끈다. 집으로 들어가니 차와 과자를 내오신다. 우리는 모수족에 관해 궁금한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모수인은 나시족 계열인데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답게 집안에서 어머니의 권한이 가장 크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한 부족이다. 남자나 여자나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간지르면 좋아한다는 의미가 된단다.

그렇게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찾아와 관계를 맺은 후 아침이면 돌아간다고 한다.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는 여자가 키우는데, 두 연인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은 아버지가 아이를 보러올 수 있고, 부양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육에 대한 결정권은 어머니가 갖고 기본적으로 아이를 부양하는 것도 어머니이다. 그렇기에 모수족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없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안다 한들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면 어머니의 집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살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연애를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다른 모수족들처럼 이 아주머니도 결혼은 하지 않으셨다. 이들 말로 '주훈'이라 하는 이 풍습은 열일곱 무렵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밤이면 여자 집으로 와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돌아가는 풍습에 관해 얘기하다가, "그럼, 리거나 루쉐이 마을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 아침마다 돌아가기엔 너무 힘들고 먼 거리 아니냐?"고 물었더니 "요즘은 다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며 웃으신다.


딸이 둘인 아주머니는 언니와 함께 산다. 침대가 하나밖에 안 보여 물어보니 화덕 옆이 가장 높은 자리이므로 그곳에서는 언니가 자고 자신은 그 옆 침상에서 잔다고 한다.

모수족 사람들이 믿는 토착 종교의 신
모수족 사람들이 믿는 토착 종교의 신김남희

만약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가 맘에 안 들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결혼을 해서 같이 살 것도 아니고, 남편이 아내를 부양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자기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니 어떻게 보면 참으로 진보적인 사회 같다. 형식과 권위와 체면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망할 놈의 사회'라고 한마디 할지는 모르지만.

내 어설픈 중국어로만 대화를 나눴다면 한계가 많았을 텐데 영어를 할 줄 아는 빙빙 덕분에 모수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슬슬 일어서니 아주머니가 배를 타고 돌아가라고 한다. 우리는 다주이까지 걸어서 가고 싶기에 사양했더니 실망하는 눈치가 보인다.

한 시간을 더 걸으니 드디어 다주이다. 사천성에 속한 다주이는 전부 나시족이 사는 마을이다. 나무짐을 지고 돌아가던 한 나시족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 산길을 헤치며 서둘러 내려오더니 집에 가서 밥 먹고 가라고 하신다.

어차피 이 마을에는 식당이 없기 때문에 아무 집에서나 점심을 먹고 밥값을 치르는 게 관례로 되어 있다.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니 식구라고는 할아버지와 몇 마리의 닭들과 소, 돼지들이 전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둘러 화덕에 불을 피우고 쌀을 씻고 밥을 앉힌다. 이어서 집집마다 집 한 구석에 높이 쌓여 있던 그 돼지가죽을 썰어 내온다. 소금을 뿌리고 최소 1-2년에서 길게는 4-5년까지 저장해놓고 먹는다는 돼지고기다.

김남희

소금에 절인 채 쌓아놓은 돼지고기 가죽들. 보통 1-2년에서 4-5년까지 저장해 놓는다.
소금에 절인 채 쌓아놓은 돼지고기 가죽들. 보통 1-2년에서 4-5년까지 저장해 놓는다.김남희
그 고기를 장작불 위에 굽더니 다음에는 물을 붓고 끓인다. 물에 불은 돼지고기를 다시 꺼내 썰더니 이번에는 야채를 넣고 볶는다. 식욕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진다. 안 봤으면 아무 것도 모르고 먹었을 텐데, 보고 나니 먹을 엄두가 안 난다. 고기를 썰던 도마와 칼과 그릇에 그대로 감자를 볶고, 다시 그 돼지고기 삶은 물에 계란과 야채를 넣고 국을 끓이신다.

냄비와 그릇은 모두 그을음에 절어 새까맣다. 그걸 본 경환이는 갑자기 빙빙에게 "저는 채식주의자예요. 고기를 못 먹어요"라며 농담을 한다. 정말이지 이럴 때는 고기라고는 입에도 못 대는 채식주의자이고 싶다.

빙빙은 고개를 돌린 채 "우리, 안 먹고 돈만 내고 나가면 안 돼?"라고 묻는다. "그건 이 분들 성의를 무시하는 거잖아. 할 수 있는 한 먹어보자"고 말하니 더 이상 나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윽고 상이 차려진다.

내가 좋아하는 감자볶음 역시 돼지고기 냄새가 나고 물에 불어 맛이 없다. 돼지고기를 한 점 집어 먹어보니 고무 타이어를 씹는 것처럼 질기다. 돼지 고기 삶은 물에 끓인 계란국 역시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골 할머니들 음식 솜씨가 다 그렇지. 우리나라도 그렇잖아?'

스스로를 설득하며 밥을 먹는다. 빙빙은 밥도 자기가 직접 아주 조금 푸더니 반찬에는 손도 안 대고 맨 밥을 먹는다. 경환이와 나는 감자볶음만으로 밥을 먹고. 할머님이 아까 돼지고기 삶은 국물을 가져오시더니 우리들 밥그릇에 부어주려고 하신다.

빙빙은 기겁을 해서 밥그릇을 치우고, 경환이는 점잖게 거절하고,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다. 물먹은 밥알은 자꾸 불어나 아무리 먹어도 줄지가 않는다. 할머니는 자꾸 많이 먹으라고 성화고. 밥 먹는 일이 이렇게 고역이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나시족 할머니가 집안에서 감자를 깎으며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나시족 할머니가 집안에서 감자를 깎으며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김남희

우리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한 나시족 할머니.
우리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한 나시족 할머니.김남희
힘겹게 그릇을 비우고 나니 이번에는 밥값을 지불할 차례다. 얼마냐고 여쭈니 우리들이 알아서 달라고 하신다. 우리는 셋이서 20원을 내기로 하고 돈을 모으는데 공교롭게도 다들 100원짜리밖에 없다. 동전까지 탈탈 털어 돈을 끌어 모으니 16.5원이다. 빙빙이 이 걸로는 안 되겠냐고 했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안 하신다.

결국 100원짜리 지폐를 드리면서 20원을 내겠다고 했더니, 잔돈을 내주는데 70원뿐이다. 돈 10원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순간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얼마라고 얘기를 하던가. 이번에는 할머니가 은팔찌를 꺼내오더니 사라고 한다. 서둘러 집을 나서니 배를 타고 돌아가라며 붙잡으신다.

아까 밥 먹으러 가기 전에는 분명히 한 사람당 7원이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1인당 70원"이라고 한다. 다들 기분이 상해 대꾸도 안 하고 돌아서니 70원, 60원, 40원까지 떨어진다. 그래도 모른 척하고 길을 재촉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아줌마가 따라온다.

빙빙이 배를 타고 싶어해 1인당 20원에 리거촌까지 가기로 하고 배를 탄다. 앞에서 두 사람이 젓고 뒤에서 또 한 사람이 젓는 조각배다. 우리는 물이 새는 통로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는다.

잠시 후 아줌마가 내게 바가지를 주며 물을 푸라고 하신다. 이 정도의 육체노동이야 내게는 '개인기'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물은 쉬지 않고 조금씩 계속 배 안으로 들이친다. 열심히 물을 푸다가 잠시 쉬니 아줌마가 재촉을 한다. 결국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내내 물을 퍼야 했다!

중간에 아줌마는 내게 굳은 살이 박힌 손을 보여주며 이렇게 힘이 드니 돈을 더 달라고 한다. 또 물이 튀어 젖은 바지와 윗도리를 가리키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아, 도대체 누가 루구호 주변 마을 중에 상업화가 하나도 안 된 다주이 사람들이 가장 순수하다고 했던가.

리거촌에 도착해 빙빙이 60원을 건네자 아줌마는 계속 돈을 더 달라고 한다. 빙빙은 기가 막힌지 대꾸도 안하고 우리를 잡아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 켠으로 씁쓸함이 번진다. 돈에 대한 욕심 없이, 혹은 그 욕심을 체념한 채 살아가던 이 시골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우리들인 것이다.

끝없이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섬으로 인해 한 지역을 관광지화하고, 혼잡하게 변화시키는 악역을 맡아온 우리들의 처지. 배낭족들끼리 만나 어떤 곳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거긴 관광객이 별로 없어!"

결국 '관광객'이 덜 붐비는 곳을 찾아 나섰던 나의 '2박 3일 나들이'는 이렇게 끝이 난다.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 그 무수하던 밤별들과 침대에 누워 바라보던 호수의 일몰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몇 마리의 돼지와 소, 닭들이 재산의 전부인 할머니집.
몇 마리의 돼지와 소, 닭들이 재산의 전부인 할머니집.김남희

다주이에서 리거촌으로 돌아가는 배를 젓고있는 나시족 아줌마.
다주이에서 리거촌으로 돌아가는 배를 젓고있는 나시족 아줌마.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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