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화려해 부담스럽게 끌리던 리장

[중국 운남성 루구호 여행기 ①] 유치한 줄도 모르고 놀아야 하는 건 아닌지

등록 2003.05.19 19:03수정 2003.05.1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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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구호 가는 길 풍경. 버스 안에서.
루구호 가는 길 풍경. 버스 안에서.김남희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시대에 살지만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다'는 고래로부터의 진리가 사장되었다는 말만큼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높은 기대치로 인해 자주 마음을 상하곤 하는 내 허술한 마음에 비한다면, 다행히도 배낭을 메고 나선 후의 나는 한 나라나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 편이다.

스물 네 살,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 안을 처음 벗어난 이후 지금까지 내게는 '정말 실망스러웠다'거나 '볼 것이 없었다'거나 '지구에 존재하는 최후의 완벽한 낙원'으로 여겨지는 곳은 없었다.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나를 고양시키는 어떤 존재와 사물들로 가득 찬 곳이라 해도 뒤편으로는 나를 낙담케 하는 어두운 요소들이 있어서 그 곳으로의 완벽한 몰입이나 경이를 가로막고는 했다. 물가 비싸고, 볼 것 없고, 사람들마저 친절하지 않다고 악평을 얻는 곳이라 해도 어딘가 한 구석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사소한 것들이 있었고, 그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있는 한 나는 늘 풍요로웠다.

리거촌 마을의 풍경.
리거촌 마을의 풍경.김남희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는 생각,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낙원이란 이 세상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관적 사고로 인해, 여행지를 선택하고 이동하는 데 있어서 가이드북이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루구호로 떠날 때 내가 특별한 것을 얻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리장의 번잡스러움을 피해 잠시라도 고즈넉한 숨고르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리장 고성은 분명 중국이 자랑하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을 숙명처럼 끌고 가는 곳이었다.

마치 절세미인이 평생을 은근하거나 노골적인 눈길에 시달리던가 '박명'해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듯. 리장 역시 송대 이후 줄곧 간직해 온 그 우아하고 화려한 외양으로 인해 점점 더 사람들의 물결 속에 자신을 놓아버려야 했다.

완벽한 미모의 여인은 순간적으로 사람의 눈을 홀릴 지는 몰라도 곧 그 완벽함으로 인해 숨이 막히거나 지루해지지 않느냐고, 좀 허술한 구석이 엿보여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마련해주는 그런 사람이 좋은 거 아니냐고 묻는 내게 "남자는 질식해 죽더라도 우선은 완벽한 미모에 매달리는 법"이라고 누군가 일침을 놓는다.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김남희
얘기가 또 옆으로 샜는데, 아무튼 리장이 내게는 '부담스럽게 끌리는' 그런 곳이었다. 리장에서 버스로 6시간 남짓 걸리는 모수족들의 마을 루구호는 그런 리장의 번잡함을 피해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물론 '호도엽 트래킹'이라는 강력한 적수로 인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아 온 것은 사실이지만. 호도엽 트래킹을 다녀오고, 며칠을 다시 리장에 머무른 후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9시에 리장을 출발한 후 닝랑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루구호에 도착하니 3시. 첫 번째 마을인 루어쉐이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벽하게 상업화된 곳임이 드러난다. 호수 주변으로 기념품 가게와 식당과 여관들이 몰려 있고, 마을의 규모도 꽤 크다. 우리는 바로 리거촌으로 들어간다.

호수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리거촌은 그새 제법 명성을 얻었는지 작은 마을 곳곳에 여관을 짓느라 어수선하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한국인들 사이에 유명한 아자네집(몇 명의 한국인 소설가가 이 곳에 머무른 후 유명세를 탄 곳)에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마을 입구의 "청춘 여관"을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고 만다.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
리거촌에서 다주이 가는 길 풍경.김남희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한 이점을 살려 방마다 커다란 창을 내고 그 창으로는 호수와 산이 가득 찬다. 얼기설기 지은 집이라 여기저기 틈이 보이고 틈 사이로 찬바람이 불고 방 안에는 나무침대 두 개가 전부인 15원짜리(2200원) 방이지만, 전망 하나만은 특급호텔 못지 않다.

침대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출을 볼 수도 있으니 게으른 여행자를 위한 호텔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쉬고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를 유혹한 건 다름 아닌 전기요다. 호도협 트래킹을 한 후 악화된 감기가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데, 전기요에라도 몸을 지질 수 있는 기회를 어찌 마다하겠는가. 배낭 하나에 모든 것을 넣고 돌아다닌다는 건 없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과정일텐데 문명의 이기에 길이 들대로 든 나는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리거촌 마을에서 매일 밤마다 벌어지는 무도회. 모수족 아가씨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리거촌 마을에서 매일 밤마다 벌어지는 무도회. 모수족 아가씨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김남희
이른 저녁을 먹고 씻으러 가는데 주인아줌마가 무도회에 가겠느냐고 물어보신다. 매일 밤마다 벌어지는 전통춤 공연이란다. 가로등도 없는 길이라 손전등을 켜고 걸어간다. 마당 넓은 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수족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과 남자들이 모여있다.

구경온 사람들은 전부 중국인들. 외국인이라고는 경환이와 나 뿐이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느린 춤부터 시작해 빠른 동작으로 변화하고, 원을 그리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풀기도 하는 춤은 우리 강강술래와 비슷하다. 중간중간 노래와 흥을 돋구는 추임새가 이어진다.

나도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서 내 멋대로 춤을 춘다. 워낙에 음주가무와 잡기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인지라 박자를 맞추며 우아하게 춤을 추는 일은 요원하지만 그냥 내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본다.

대학에 갓 들어가던 해, 신입생 환영 수련회에서 강강술래를 추던 생각이 난다. 춤을 이끌며 '꺾자 꺾자 고사리꺾자' '풀자 풀자 고사리 풀자'를 투박한 목청으로 외치던, 어린 나를 사로잡던 그 풍물패의 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무짐을 지고 가는 모수족 할머니
나무짐을 지고 가는 모수족 할머니김남희
지금 남도에는 누가 남아 달 밝은 대보름 밤이면 강강술래를 추고 있을까. 우리는 왜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걸까? 리장에서도 나시족들이 매일 광장에 모여 노래나 악기 연주를 배우며 전통문화를 지키고, 밤마다 관광객들과 전통춤을 추는 자리를 만들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방인들을 매료시키더니, 이 작은 마을에서조차 이렇게 관광객을 끌기 위해 매일 공연을 벌인다.

우리는 이름난 관광지의 연례행사에 가거나, 인사동이나 '한국의 집' 같은 고급 한정식집에서나 전통공연을 볼 수 있을까?

한바탕 땀이 나도록 춤을 추고 나니 이번에는 모수족과 관광객 두 팀으로 나눠서 노래자랑을 한다. 한 곡이 끝나면 바로 상대팀에서 다른 곡을 이어받고, 노래를 이어받지 못해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한다고 한다.

중국 노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지켜보다가 '우리도 아리랑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침 춤판을 이끌던 모수족 청년이 한국 노래 한 곡 하겠느냐고 묻는다.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지. 하겠다고 하고 경환이를 끌고 나간다.

활짝 핀 배꽃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
활짝 핀 배꽃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김남희
우리가 선정한 곡은 역시 아리랑. 단순해서 부르기도 쉽고, 구슬픈 멜로디로 외국인들도 다 좋아하는 곡이다. 아리랑을 부르고 들어와도 노래자랑은 끝없이 이어진다. 수십 곡을 연달아 부르고 난 후 모닥불이 꺼지고 자리는 파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하다. 경환이 표현대로라면 "머리카락 속의 비듬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다. 이 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이렇게 빛나는 별을 본 지도 무척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숙소로 돌아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하늘 가득 밤별들이 살아난다.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별들. 이럴 때는 '못난 자기'라도 한 명 있어서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며 유치한 줄도 모르고 놀아야 하는 건 아닌지….

리거촌 마을의 풍경.
리거촌 마을의 풍경.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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