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능선에 앉아 단종을 생각하다

[문화유산답사 69] 단종의 애환을 찾아③ - 영월 ‘장릉’

등록 2003.06.11 11:59수정 2003.06.1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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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6대 왕인 단종의 장릉.
조선 6대 왕인 단종의 장릉.권기봉

어리실 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시고
멀리 벽촌에 계실 때에
마침 비색한 운을 만나니
임금의 덕이 이지러지도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목이 메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구나
시월 달에 뇌성과 바람이 이니
하늘의 뜻인들 어찌 끝이 없으랴
천추의 한이 없는 원한이요
만고의 외로운 혼이로다
적적한 거친 산속에
푸른 소나무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높은 저승에 앉으시어
엄연히 곤룡포를 입으시고
육신들의 해를 꿰뚫는 충성을
혼백 역시 상종하시리라


숙종(肅宗)이 단종을 생각하며 썼다는 시다. 노산군(魯山君)에 이어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었던 단종. 17년의 한 많은 삶을 살다간 그는 숙종 7년인 1681년 노산대군으로 승격된 데 이어 1698년 단종순정안장경순돈효(端宗純定安葬景順敦孝; 단종)로 복위되었다. 그가 죽은 것이 1457년 10월 24일의 일이니 다시 왕이 되는 데 거의 2백년도 더 걸린 셈이다. 물론 이미 죽은 몸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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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정자각과 같은 건물은 단종이 죽은 지 한참 후에야 들어선 것이다. 근 1백년간 단종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고, 복위도 사후 2백 년이 흘러서야 이루어진다. 오른쪽 능선 위에 능과 담이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정자각과 같은 건물은 단종이 죽은 지 한참 후에야 들어선 것이다. 근 1백년간 단종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고, 복위도 사후 2백 년이 흘러서야 이루어진다. 오른쪽 능선 위에 능과 담이 보인다.권기봉
복위되기까지의 200년 간 단종은 잊혀진 왕이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역적으로 몰릴 판이니 누구 하나 나서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사약을 받고 죽었든 활줄에 목이 졸려 죽었든 혹은 자결을 했든 승하 당시 그의 시신을 거두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강에 내다버린 주검에 괜시리 손을 댔다가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이 그러하니 당연히 그의 무덤도 중종(中宗) 11년인 1517년 봉분을 갖출 때까지 제대로 알려질 리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권의 위협이 심해도 이를 따르지 않던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영월에는 단종을 측은히 생각하고 따르는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하니 누군가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으리라 집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영월 호장(戶長)으로 있던 엄흥도(嚴興道)라는 이가 몰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산속으로 도망가다 일단 노루가 앉아 있던 곳에 묘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설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은 일반적인 왕릉과는 달리 높다란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한 겨울 노루가 앉아 쉴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땅이 덜 얼어 있는 양지바른 곳이었을 것이다. 또한 주위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얼었을 테니 엄흥도가 땅을 파는 데도 더 수월했을 것으로 보인다.

죽어서도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 단종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묘가 만들어질 당시 동월지산은 영월 엄씨의 선산으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종의 시신을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암매장했다.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묘가 만들어질 당시 동월지산은 영월 엄씨의 선산으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종의 시신을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암매장했다.권기봉
단종이 암매장된 동을지(冬乙支)산을 올랐다. 때아닌 강한 햇살을 받으며 오른 산은 그러나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그늘로 시원했다.


서울 인근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머나먼 영월에 자리 잡은 장릉. 본디 왕릉은 서울에서 1백 리 이내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유독 단종의 능만은 여기 영월 땅에 자리잡았다. 하기야 죽을 당시에 주검을 거두는 이도 없었을 뿐더러 근 1백 년 이상을 야산에 암매장된 상태로 지냈으니 어쩌면 영월에서 한을 풀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런 시절 유배를 떠나와 얼마 뒤 바로 죽임을 당한 그이기에 감회가 사뭇 남다르다.

장릉은 생각보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武人石)이 없다는 것이다. 문신석과 석수(石獸), 장명등(長明燈)만이 있을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칼을 든 자에게 왕위를 빼앗겨 나중에 능을 복원할 때 일부러 무신석은 세우지 않았다고 하니, 맺힌 한은 죽어서도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유가 상실된 시대에 살다

지금이야 우거진 숲 속에 한적하게 자리잡고 있어 그저 세상사에 피로를 느낀 이들이 찾는 유원지가 되어 버린 장릉이지만, 풀밭에 앉아 당시를 생각해 보면 씁쓸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든다.

장릉 앞에 서면 지대가 높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보통 왕릉은 서울 1백 리 안에 세우지만 장릉만은 거의 5백 리나 떨어진 영월에 위치하고 있다.
장릉 앞에 서면 지대가 높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보통 왕릉은 서울 1백 리 안에 세우지만 장릉만은 거의 5백 리나 떨어진 영월에 위치하고 있다.권기봉
과연 권력이 무엇이기에 열 몇 살밖에 되지 않는 조카를 머나먼 영월까지 몰아내야 했을까? 또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기에 그를 따르던 신하들까지 모조리 처형해야 했을까? 어린 단종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사약을 내리면서까지 죽음을 강요했을까?

과연 세조와 그 일파는 자신들이 나서서 국가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선 것일까? 아니면 단지 권력이란 것이 그리도 달콤했기에 왕위를 빼앗은 것인가? 왕권과 신권 사이의 투쟁 결과라는 지적도 있지만, 인간의 도리를 넘어서는 잔인한 일을 벌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릉에는 유독 무인석이 없다. 왜일까?
장릉에는 유독 무인석이 없다. 왜일까?권기봉
지금은 어떠한가. 몇 백 년이 흘렀다지만 아직도 타인에 대한 배척과 폭력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자신으로부터 이탈할 조짐을 보이면 가차 없이 내치는 현실. 알고 보면 별반 다를 바 없는데도 자신의 허명을 조금이라도 더 날리기 위해 약한 상대의 약점이나 파고드는 용렬함. 그 속에서 여유와 기다림, 상대에 대한 배려나 대화는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에 단종의 애환이랍시고 떠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상대와 대화를 하려는 의지를 잃는 순간 우리는 다시금 인간성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유와 기다림, 대화를 생각할 일이다.

정조 15년인 1791년 군수 박기정(朴基正)이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제정(祭井)으로 쓰이게 된 우물로, 영천(靈泉)이라 불린다. 평소에는 샘이 솟는 양이 얼마 안 되다가 장릉 제사가 있는 한식 때는 수량이 많아진다는 전설이 있다.
정조 15년인 1791년 군수 박기정(朴基正)이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제정(祭井)으로 쓰이게 된 우물로, 영천(靈泉)이라 불린다. 평소에는 샘이 솟는 양이 얼마 안 되다가 장릉 제사가 있는 한식 때는 수량이 많아진다는 전설이 있다.권기봉


왕의 뒤를 이은 세 신하
영월 ‘충절사’에 가다

▲ 충절사
ⓒ권기봉
영모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충절사(忠節祠)라는 곳이 있다. 단종과 관련된 세 신하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세 신하는 엄흥도(嚴興道)와 정사종(丁嗣宗), 추익한(秋益漢)이다.

1) 엄흥도가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승하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속에서도 주검을 거둔 자가 있었으니 엄흥도였다. "爲善被禍 吾所甘心(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떤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는 말을 하며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묻고 자취를 감추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1877년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 정사종은 단종을 모시는 익위(翊衛) 벼슬과 군위 현감을 하던 차에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단종의 안위를 걱정했다. 단종의 시신이 동강에 버려진 데 대해 엄흥도가 이를 거두자고 하자 동조하면서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 후 청령포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너희들은 농촌으로 돌아가 후손들로 하여금 소나 기르고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지 절대로 공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3) 추익한(秋益漢)은 한때 한성부윤으로 지내다가 1434년 사직하고 고향 영월로 내려가 있다가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월로 옮겨와 살면서 단종을 찾아가 문안드리고 머루와 달래 등 귀한 과실을 구해 진상했다고 한다. 단종은 추익한이 진상하는 과일을 맛있게 들고 그에게 크게 위로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성명을 밝히지 않고 다만 촌민이라고만 하였다.

어느 날 추익한은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려고 영월로 오던 중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에 백마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은 황망히 읍하고 땅에 꿇어앉아 “대왕마마께서는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하고 여쭈니 단종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 그것은 처소에 갖다 두시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를 기이하게 생각한 추익한이 급히 단종 처소에 가보니 단종은 이미 승하한 뒤였다. 추익한은 방금 전 만났던 것이 단종의 혼령이었음이 분명하다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종과 함께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권기봉

단종의 애환, 산 능선에 걸리다.
장릉 찾아가는 방법

ⓒ권기봉

장릉은 이미 많이 알려진 곳이기 때문에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영월에서 제천 쪽으로 38번 국도를 약 1.4km 정도 가면 나온다. 영월에서 가는 버스도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도 쉽다.

문의는 영월군청 문화관광과(033-370-2542)나 영월군 관광안내(033-370-2619)를 이용하면 된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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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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