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왕암의 전설

[문화유산답사 70] 감포 ‘문무대왕릉’을 찾아

등록 2003.06.14 15:05수정 2003.06.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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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본 대왕암.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본 대왕암.권기봉
밤새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모양이다. 차창 밖으로 밀려가는 6월의 경주가 그저 초록의 물결로만 느껴진다. 어제는 차(茶)를 좋아하는 벗들과 남산에 올라 세월의 더깨가 잔뜩 낀 불상들을 돌아보며 우수에 잠긴 차를 마셨다. 불탄 남산을 점점 푸르게 물들이는 여린 나무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밤새 술 그리고 끝없는 이야기.

어제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승합차는 4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내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토함산의 북동쪽 산자락을 타고 추령터널을 지난 승합차가 마침내 시원한 바다 앞에 선다. 동해다.


조선후기에는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이 가까운 곳에 숭복사가 있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 경주오악조사단의 발표로 김씨 문중은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했다.
조선후기에는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이 가까운 곳에 숭복사가 있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 경주오악조사단의 발표로 김씨 문중은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했다.권기봉
동해는 남다른 바다다. 비록 뛰어들어 신나게 놀 수 있는 계절은 아니라지만 그저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그런 바다가 동해다. 온갖 번뇌가 사라지고 다시금 활력 잃은 생활에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바다가 동해다. 오늘 동해에 섰다.

이곳은 봉길리 앞 모래사장. 아직 이른 아침이라 말린 미역과 오징어를 파는 아주머니들과 몇 명의 강태공 뿐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으로 나아간다. 어제의 술은 물론 서울서 안고 내려온 여러 고민들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는 듯한 시원함을 느낀다. 동해의 바람은 참으로 맑았다.

동해 입구의 작은 바위섬

대왕암을 가까이서 찍은 사진으로, 네 방향으로 나있는 수로로 바닷물이 드나들지만, 안쪽 공간은 항상 잔잔한 수면이 유지된다고 한다. 대왕암 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돌이 있는데, 덮개돌로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대왕암을 가까이서 찍은 사진으로, 네 방향으로 나있는 수로로 바닷물이 드나들지만, 안쪽 공간은 항상 잔잔한 수면이 유지된다고 한다. 대왕암 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돌이 있는데, 덮개돌로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경주시
대종천(大鐘川) 물길과 동해가 만나는 이 곳을 사람들은 동해구(東海口)라 부른다 했다. 곧 동해의 입구.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 제7 문무왕 21년(681년) 추(秋) 7월 1일조에 보면 “7월 1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군신(群臣)이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여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해구’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딱 한번 나오는 기록이지만, 고대 신라 시대에는 이곳이 수도 경주에서 동해에 이르는 최단 거리에 있어 왜구들이 자주 상륙하곤 했다고 하니 언뜻 그럴싸한 이름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서있는 이 바다는 백제와 맞닿은 차령산맥이나 저 북쪽 고구려와의 국경 못지않은 국방상 요충지였다는 얘기가 된다.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을 찾으라"
우현 고유섭의 시와 글

우현(又玄) 고유섭 (高裕燮)은 우리나라 미술사를 정리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전국을 답사한 미술사학자다. 대왕암과 관련 그가 남긴 시와 글이 있어 소개한다.

대왕암

대왕(大王)의 우국(憂國) 성령(聖靈)은
소신(燒身) 후 용왕(龍王) 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敵鬼)를 조복(調伏)하시고

우국지성(憂國至誠)이 중(重)코 또 깊으심에
불당(佛堂)에도 들으시다
고대(高臺)에도 오르시다
후손(後孫)은 사모(思慕)하야
용당(龍堂)이요 이견대(利見臺)라더라

영령(英靈)이 환현(幻現)하사
주이야일(晝二夜一) 간죽세(竿竹勢)로
부왕부래(浮往浮來) 전(傳)해주신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은 감은고탑(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대종천(大鍾川) 복종해(覆種海)를
오작(烏鵲)아 뉘지 마라
창천(蒼天)이 무심(無心)커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미물(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 하더라


- <고려시보(高麗時報)> 1940년 7월 16일~8월 1일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길어보아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위업(偉業)과 김유신(金庾信)의 훈공(勳功)이 크지 아님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文獻)에서도 우리가 가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건천(乾川)의 부산성(富山城)도 남산(南山)의 신성(新城)도 안강(安康)의 북형산성(北兄山城)도 모두 문무왕의 국방적(國防的) 경영(經營)이요, 봉황대(鳳凰臺)의 고대(高臺)도 임해전(臨海殿)의 안압지(雁鴨池)도 사천왕(四天王)의 호국찰(護國刹)도 모두 문무왕의 정경적(政經的) 치적 아님이 아니나,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으라.”


-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의 <전별(餞別)의 병(甁)> 中 ‘경주기행의 일절’에서 (p. 17)
/ 권기봉
동해구의 압권은 아무래도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곧 대왕암(大王岩)이 아닐까 싶다. 이른 새벽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대왕암이 바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동해구 대석상’이다.

대왕암은 해변에서 약 2백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이견)대(利見臺) 아래 칠십 보를 나가면 바다 속에 돌이 있으니 네 귀가 솟아 있는 것이 네 문과 같은데 이곳이 장사지낸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른바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왕릉이라는 얘기다.


"내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리라"

원래 국가간 긴장이 높고 갈등 요소가 많은 곳에는 여러 전설과 영웅이 남게 마련이다. 서쪽의 트로이와 갈리아가 그랬고 동쪽의 잉카와 마야가 그랬다. 동해구에서도 한 전설을 접한다.

문무왕. 김춘추 곧 무열왕의 아들로 태어나 676년 끝내 당(唐)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남북국시대를 연 신라 30대 왕이다. 동해구는 그의 전설로 시작해 그의 전설로 끝나는 문무왕의 바다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있던 당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거듭하던 문무왕은 죽을 때조차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21년 조는 전한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돌을 쪼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물길로, 대왕암 내에는 이런 물길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돌을 쪼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물길로, 대왕암 내에는 이런 물길이 남아 있다고 한다.안장헌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스럽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


이와 관련해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무왕이 죽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고자 한다는 이야기에 지의법사(智義法師)가 문무왕에게 물었다고 한다. 용은 짐승인데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문무왕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왕암의 평면도와 단면도.
대왕암의 평면도와 단면도.안장헌
“세간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다. 비록 추한 보답으로 축생으로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의 뜻에 합당할 것이다.”

나중에 덧씌워진 것이 없진 않겠으나 문무왕이 얼마나 왜구의 침입에 고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말 이곳이 문무왕의 무덤일까?

그러나 이 바위섬에 정말 문무왕이 매장된 것인지는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문무왕을 이곳에 매장(埋葬)한 것인지 그저 화장 후 산골(散骨)한 것인지가 쟁점인데, 아직 학계에서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밝히려는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67년 5월 <한국일보> 주관으로 ‘신라오악(五嶽)조사단(조사단)’이 토함산 지구 제3차 조사에서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터를 조사한 일이 있다. 5월 2일과 15일 조사단의 현장 조사를 통해 같은 달 17일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대왕암은 문무왕의 수중릉이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본 감은사터와 대왕암으로, 감은사는 대왕암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늘에서 본 감은사터와 대왕암으로, 감은사는 대왕암과 깊은 관련이 있다.안장헌
또한 1982년 문화재관리국이 대왕암의 뚜껑돌로 추정되는 넓적한 돌을 조사하기로 했는데, 다이버가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 갑자기 조사를 포기했던 적이 있다.

당시 발굴에 참여한 전(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록 진위 논란이 재연될지라도 하나의 금기로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의 비밀이 있어야 신비스러움이 유지되고 그래야만 대왕암의 의미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진위 여부가 아니라 대왕암에 서려있는 문무왕의 나라 사랑 정신이기 때문이다. 조사를 중단한 것에 대해 지금도 후회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로 경주 지역의 한 공무원이 몰래 대왕암 석실을 열고 원효(元曉)의 ‘원효결서’를 꺼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혼자 힘으로 들 수 있는 바위도 아니고 증인이나 증거도 없기에 믿기 힘들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왕암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교수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대왕암은 매장터가 아니라 그저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후 뼛가루를 뿌린 곳, 즉 산골처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1796년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는 문집 <이계집(耳溪集)>에서 자신이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발견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 두 편 중 한 편과 작은 파편 하나가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나무를 쌓아 장사지내다,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한다. 곧 대왕암은 시신을 매장한 곳이 아니라 산골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왼쪽에 보이는 산 능선에 이견대가 있다.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는 곳인데,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대왕암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산 능선에 이견대가 있다.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는 곳인데,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대왕암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권기봉
한편 문무왕의 시신은 경주 낭산(狼山)의 능지탑(陵旨塔) 부근에서 화장한 후 동해구에 뿌려졌고, 동해구는 이후 신라 김씨 왕가의 공동능역으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술사학자 황수영은 <신라의 동해구>를 통해 “신라에서 화장(火葬)이 유행한 7세기 후반부터 문무왕을 최초로 이후의 왕들과 귀족들이 화장을 택했고, 대부분 산골의 형식으로 동해구에 뿌렸다”고 추정한 바 있다.

대왕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있어 대왕암에 문무왕의 시신을 매장했든 아니면 그저 산골을 했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작 대왕암에서 찾고자하는 것은 그의 시신의 DNA도 뼛가루의 흔적도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광개토대왕 등의 영웅을 끄집어내 상무(尙武)정신을 강조하고 군사영웅사관을 퍼뜨리려 했던 대통령 박정희의 생각처럼 ‘외세를 물리친 대단한 문무왕’을 발견하기 위함도 물론 아니다.

석굴암에서 해뜨는 방향에 대왕암이 있다고 한다. 동해구를 중심으로 석굴암과 대왕암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석굴암에서 해뜨는 방향에 대왕암이 있다고 한다. 동해구를 중심으로 석굴암과 대왕암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안장헌
차츰 밝아오는 햇살을 따라 대왕암을 따라 걷는다. 배는커녕 수영을 해도 건너갈 수 있는 바다 너머로 대왕암이 눈에 들어온다. 일렁이는 파도 저편의 대왕암을 시선 가득 넣은 채 당시로 한번 돌아가 생각해 본다.

과연 문무왕은 왜 자신을 동해구에 묻어달라고 한 것인가. 아니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왜 이런 이야기가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는 걸까.

<삼국사기> 등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은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용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견 <전설의 고향> 같은 데나 나오는 무의미한 주술 행위에 다름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를 살아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법. 일반적으로 수도에 왕릉을 조성하는 관례와는 달이 토함산 너머의 바다까지 나와 무덤을 쓴 이유가 과연 무얼까.

아마도 왜구가 들끓는 동해와 신라의 수도 경주를 일직선으로 잇는 동해구에 왕의 무덤 혹은 산골처를 마련함으로써 민중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 같은 행위가 실질적인 국방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을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 수준이 지금보다 높았을 리 없고 남산에 산적한 수많은 불상에서 보듯 자신의 염원을 절대자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신라인. 그들로서는 눈에 보이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정신적인 의지가 되어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구의 침입을 바다에서부터 막아주는 용이나 불기만 하면 왜구를 물리쳐주고 가뭄과 홍수를 해결해준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동해에 살던 이들을 비롯, 신라인들의 정신적인 안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봉길리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바다도 바다거니와 대부분 대왕암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온 이들처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오래 보기 위해 해변을 떠날 줄 모른다.

과연 그들은 대왕암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왕암의 전설은 그저 천 몇 백 년 전의 흘러간 옛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지도
지도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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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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