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을 가까이서 찍은 사진으로, 네 방향으로 나있는 수로로 바닷물이 드나들지만, 안쪽 공간은 항상 잔잔한 수면이 유지된다고 한다. 대왕암 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돌이 있는데, 덮개돌로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경주시
대종천(大鐘川) 물길과 동해가 만나는 이 곳을 사람들은 동해구(東海口)라 부른다 했다. 곧 동해의 입구.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 제7 문무왕 21년(681년) 추(秋) 7월 1일조에 보면 “7월 1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군신(群臣)이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여 그 돌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해구’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딱 한번 나오는 기록이지만, 고대 신라 시대에는 이곳이 수도 경주에서 동해에 이르는 최단 거리에 있어 왜구들이 자주 상륙하곤 했다고 하니 언뜻 그럴싸한 이름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서있는 이 바다는 백제와 맞닿은 차령산맥이나 저 북쪽 고구려와의 국경 못지않은 국방상 요충지였다는 얘기가 된다.
| | |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을 찾으라" | | | 우현 고유섭의 시와 글 | | | | 우현(又玄) 고유섭 (高裕燮)은 우리나라 미술사를 정리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전국을 답사한 미술사학자다. 대왕암과 관련 그가 남긴 시와 글이 있어 소개한다.
대왕암
대왕(大王)의 우국(憂國) 성령(聖靈)은 소신(燒身) 후 용왕(龍王) 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敵鬼)를 조복(調伏)하시고
우국지성(憂國至誠)이 중(重)코 또 깊으심에 불당(佛堂)에도 들으시다 고대(高臺)에도 오르시다 후손(後孫)은 사모(思慕)하야 용당(龍堂)이요 이견대(利見臺)라더라
영령(英靈)이 환현(幻現)하사 주이야일(晝二夜一) 간죽세(竿竹勢)로 부왕부래(浮往浮來) 전(傳)해주신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은 감은고탑(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대종천(大鍾川) 복종해(覆種海)를 오작(烏鵲)아 뉘지 마라 창천(蒼天)이 무심(無心)커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미물(微物)이라도 뜻있어 운다 하더라
- <고려시보(高麗時報)> 1940년 7월 16일~8월 1일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길어보아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위업(偉業)과 김유신(金庾信)의 훈공(勳功)이 크지 아님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文獻)에서도 우리가 가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건천(乾川)의 부산성(富山城)도 남산(南山)의 신성(新城)도 안강(安康)의 북형산성(北兄山城)도 모두 문무왕의 국방적(國防的) 경영(經營)이요, 봉황대(鳳凰臺)의 고대(高臺)도 임해전(臨海殿)의 안압지(雁鴨池)도 사천왕(四天王)의 호국찰(護國刹)도 모두 문무왕의 정경적(政經的) 치적 아님이 아니나,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으라.”
-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의 <전별(餞別)의 병(甁)> 中 ‘경주기행의 일절’에서 (p. 17) / 권기봉 | | | | |
동해구의 압권은 아무래도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곧 대왕암(大王岩)이 아닐까 싶다. 이른 새벽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대왕암이 바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동해구 대석상’이다.
대왕암은 해변에서 약 2백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이견)대(利見臺) 아래 칠십 보를 나가면 바다 속에 돌이 있으니 네 귀가 솟아 있는 것이 네 문과 같은데 이곳이 장사지낸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른바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왕릉이라는 얘기다.
"내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리라"
원래 국가간 긴장이 높고 갈등 요소가 많은 곳에는 여러 전설과 영웅이 남게 마련이다. 서쪽의 트로이와 갈리아가 그랬고 동쪽의 잉카와 마야가 그랬다. 동해구에서도 한 전설을 접한다.
문무왕. 김춘추 곧 무열왕의 아들로 태어나 676년 끝내 당(唐)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남북국시대를 연 신라 30대 왕이다. 동해구는 그의 전설로 시작해 그의 전설로 끝나는 문무왕의 바다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있던 당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거듭하던 문무왕은 죽을 때조차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21년 조는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