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발길

항일유적답사기 (37) - 화전·반석

등록 2003.06.12 20:23수정 2003.06.1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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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을 가로지르는 휘발하, 지난날 화성의숙 학생들의 훈련장이었던 곳이다. ⓒ 박도

화전· 반석

소과전자촌에서 한 시간 남짓 머문 후, 다시 길림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반석(磐石)까지 가야만 내일 일정에 차질이 없다고 한다.

길림에서 영길(永吉)로 달렸다. 우리 일행은 우선 승용차로 갈 수 있는 데까지 달리고 보자는 심산으로 점심까지 거르면서 달렸다. 그래야만 내일 일정이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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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시 인민정부, 답사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그곳 인민정부다. 거기서 물으면 가장 정확하게 가르쳐 준다. ⓒ 박도

마침 도로 옆에 참외 장수가 띄엄띄엄 전을 펴고 있어서 요기도 하고 갈증도 달랠 겸, 차를 세우고 참외와 수박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과일 값은 매우 쌌지만 때깔과 당도는 우리네 것만 훨씬 못했다.

여기도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2차선을 4차선으로 늘리고 있었다. 대부분 공사장에는 아직도 사람이 괭이와 삽질을 했지만, 드문드문 포크레인과 불도저도 보였다.

때때로 포크레인 몸체에 보이는 ‘DAEWOO’,‘SAMSUNG’이라는 낯익은 로고가 눈에 띄어 더 없이 반가웠다. 누구나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오후 3시 30분, 화전(樺甸)에 도착했다. 시가지는 말쑥했고, 거리에는 자동차보다 해 가리개를 친 삼륜 자전거, 오토바이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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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시내 거리 풍경 ⓒ 박도

동북 삼성 어느 곳인들 항일 전적지가 아니랴. 이곳은 1924년 11월 24일,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전 민족의 모든 무력을 한 곳으로 집중한 군사 통일회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주장 아래, 그동안 독립 단체들인 대한통의부 등 8개 단체가 전만통일회(全滿統一會)를 개최하고 통합 독립군단 정의부(正義府)를 발족한 유서 깊은 곳이다.

1925년 정의부에서는 화성의숙(華城義塾)이 설립하여 독립군 이세들을 길렀다. 숙장은 천도교의 최동오(崔東旿) 선생이 맡았으며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다.

동북의 역사에 밝은 김중생 선생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잠시 이 학교에서 수학한 바가 있다고 했다. 이곳도 그때와는 너무나 많이 변해서 화성의숙은 찾지 못했다.

다만 화성의숙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했다는 휘발하(輝發河) 강가에서 차를 세우고 장거리 강행군에다 뜨거운 날씨로 열을 많이 받았을 승용차의 엔진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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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 시내 번화가 ⓒ 박도

역사 유적에 대한 표지가 없거나 믿을만한 증인이 없는 곳에서 60, 70년 전의 유적지를 찾는 일은 소나무 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힘들었다. 그 새 도시 계획으로 시가지가 확 바뀐 곳에는 더더욱 어렵다.

오후 5시 20분, 해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애초 계획보다 일찍 반석에 도착했다. 우리 기분 같아서는 더 남서쪽으로 달려가서 매하구(梅河口)나 유하(柳河)에서 일박하고 싶었지만, 온종일 뙤약볕 아래 계속 운전한 왕빙이 힘들 것 같아서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시가지 중심부에 제일 번듯해 보이는 금하 빈관에다 여장을 풀었다. 온수는 저녁 8시 이후에 나온다지만 온종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더위에 지쳐서 그냥 찬물에 샤워를 했다. 찌뿌드드한 몸이 금세 가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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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하남시장 건물 ⓒ 박도

저녁 식사를 겸해 반석 시가지를 산책했다. 여러 농수산물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한 시장을 둘러봤다. 시장 안은 그야말로‘호떡집에 불난 듯’ 매우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나 비슷했다.

다만 사람과 말씨와 판매하는 품목의 모양새만 조금 다를 뿐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동서양 고금의 인류 보편적인 진리도 거의 같다. 그에 따른 해석과 표현이 조금 다를 뿐이다.

산 자의 발길

1999년 8월 9일 (월)
3시에 잠이 깼다. 커튼을 제치고 하늘부터 바라봤다. 별이 총총하다. 오늘 날씨도 좋을 모양인가 보다.

답사자로서 제일 관심사는 날씨다. 날씨가 궂으면 강행군을 할 수도 없고, 설사 강행군을 하더라도 제대로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청승스럽기 그지없다. 어제의 일정을 정리하고 오늘 여정을 확인했다.

이번 답사 여행은 열흘 남짓한 장기 여행이지만 짐은 최소로 꾸렸다. 여행 중에 짐처럼 짐스러운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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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쓴 강용권씨의 항일유적답사기

나의 이번 답사 여행은 든든한 안내자와 동행하지만 참고 도서만은 빠트릴 수 없었다. 여러 책 중에서 가장 요긴하게 참고한 것은 강용권씨의 <죽은 자의 숨결 산 자의 발길>과 한국독립유공자협회에서 펴낸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였다.

여행을 할 때 가장 긴요한 자료는 뭐니 해도 지도다. 다음으로는 안내 책자이다.

어디로 가야 무엇을 볼 수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어떻게 가야하고, 그곳에서는 어떤 역사 유적지가 있는가를 자세히 일러주는 안내 책자야말로 어두운 밤에 나침반이다. 강용권씨의 만주 항일 답사기는 이곳 유적지에 까막눈이다시피 한 나에게는 길잡이였다.

강용권씨는 1945년 중국 헤이룽장성 목단강시에서 태어났다. 연변대학 조선어 문학부를 졸업하고, 10여 년 교직생활을 하다가 1983년부터 길림성 안도현에서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 일대 항일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다가 1999년 과로로 쓰러져 작고한 분이다.

이분은 1984년부터 만주 각지를 다니면서 조선족 역사, 특히 묻혀진 1910-20년대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조사 탐방 고찰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고 뒷사람을 위해 당신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꼼꼼히 남겼다.

당신은 손수 자전거로 7,500여 킬로미터를 달리면서 동북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600여 명의 증인을 만나 70-80년 전의 역사를 밝혔다.

남북한에서 외면한 1910-20년대의 항일 역사를 발굴하여 항일 투쟁사의 체계성을 갖게 하고, 아울러 끊어졌던 독립운동사의 명맥을 잇게 했다.

사실 그 시대의 역사 현장은 남쪽에서는 그동안의 국제 관계로 접근할 수 없었고, 북쪽에서는 민족계열의 독립운동사는 깎아 버려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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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용권 선생

“강용권 선생 그분 정말 대단한 애국자입니다. 그분 열정에 탄복했어요. 나라에서 비석이라도 세워줘야 할 분이에요. 그렇게 애써 동북 삼성을 누비다시피 답사를 하고 책을 펴냈는데, 인세로 딱 한번 80여 만원을 서울의 아무개 출판사에서 받아 내가 심부름했을 뿐이에요.”

강용권씨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중생 선생의 말씀이었다.

10여 년을 열악한 여건에서 피땀 흘린 이분의 고행도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 아닐까? 두 분의 안내를 받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10여 일간 동북 삼성을 주차간산(走車看山)하는 나의 답사가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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