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것들 사는 것 보면 한심하지요"

여기는 해발 800m 지리산 농평 마을

등록 2003.06.19 12:06수정 2003.06.2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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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밤새 마신 탓인지 숙취가 해소되지 않아 섬진강변을 타고 화개장터에서 재첩국으로 속을 달랜 다음 하늘아래 첫 동네를 찾기로 했다. 하늘과 마을이 맞닿았다는 해발 800m의 산자락에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단다. 태풍소식으로 연일 떠들썩하지만 지리산에는 고요하게 비만 흩뿌려진다.

구례군 토지면 농평 마을


섬진강변에서 자가용으로 구불구불 고갯길을 30여 분 오르자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설마 이런 곳에 사람이 살라구요."
"옛날에는 속세를 떠난 도인들이 터를 잡았다는군.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낙천적이고 순수한지 반 도인이야."

농평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집배원 이상희씨
농평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집배원 이상희씨김대호
동행한 피아골청소년수련관 윤보혁(남·44) 원장이 껄껄 호방하게 웃는다. 구비구비 언덕길을 오르자 우편배달원 한 분이 길을 막고 서 있다.

"산이 워낙 가파르다 보니 오토바이도 힘이 부친다. 잠시 담배 한 대 피우고 다시 오르려고 기계도 좀 쉬고 나도 좀 쉬고 있다"고 웃는 이 사람은 토지 우체국에 근무하는 이상희(남·36)씨.

그는 "눈비가 내리면 위험하고 힘들지만 이곳 사람들이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기 때문에 보람이 더 크다"며 "도회지의 자식들 편지부터 시작해 마을 어르신 심부름까지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대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도회지 사람들과 달리 이곳 주민들은 밥 때가 되면 밥 먹고 가라고 잡는다"며 "주민들과 공무원의 관계는 가족 같은 관계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씨와 헤어져 다시 한참을 오르자 산 중턱에 시루떡처럼 펼쳐진 작은 논과 밭이 나온다. 작은 교회 터와 초등학교 흔적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엔 사람이 제법 살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6가구만 남아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한때는 40여 가구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시루떡처럼 펼쳐진 산위의 논
시루떡처럼 펼쳐진 산위의 논김대호

사람들은 떠나고 폐가만 남고
사람들은 떠나고 폐가만 남고김대호

학교는 사라져도 이승복동상은 남고
학교는 사라져도 이승복동상은 남고김대호
대부분 어르신들일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30대 청년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 마을 터줏대감 이인제(남·38)씨는 멋들어지게 수염을 길러 털보로 통한다. 그가 한마디 한다.

"인간은 산을 파헤쳐 헐벗게 하지만 산은 사람에게 끝도 없이 퍼준다. 염소도 방목하고 고로쇠에다 약초, 나물, 한봉까지 쉴 틈 없이 퍼주기만 한다. 마치 살진 어머니 젖무덤 같다."


나주에서 시집왔다는 부인 서은경(여·36)씨도 덧붙인다.

"시댁은 산 아래 토지면에 위치하고 있지만 남편의 탯자리라서 귀향을 결정하게 됐다. 아이들 교육 문제만 아니면 황후장상이 부럽지 않다."

산사람 이인제씨
산사람 이인제씨김대호

우리나라서 제일 높은(?) 어린이 미현이
우리나라서 제일 높은(?) 어린이 미현이김대호
여기까지 어린이 집에서 데리러 오지 않기 때문에 6살과 5살인 다현이, 미현이를 데려다 주고 오려면 바쁜 농사철엔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닐 게다. 산 아래 작은 초등학교가 있지만 학생이라야 6명에 불과해 폐교 이야기가 터져 나오니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산아래 사람들을 '속세사람들'이라고 곧잘 농을 던진다. "'아랫것들' 사는 것 보면 한심하지요?"하고 50이 조금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에게 농을 던졌다.

"죽으면 썩어질 육신 머할라고 저 지랄들을 해쌌는지…. 등따시고 배부른께 쌈할 궁리만 찾는 것이여. 애기들 볼까 싶은디 여럽도(부끄럽지도) 않은 갑서"하고 나름대로 명쾌한 정세분석을 하신다.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엔 공사가 한창이다. 동아건설에서 전무를 했다는 김한수(남·65)씨가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묘소를 지킨다고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주객들을 유혹하는 약초술들
주객들을 유혹하는 약초술들김대호
"형님도 아랫마을에 터를 잡으셨는데 목포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김철수(남·75) 교수다. 몇 년 전 한나라당 최형우 의원과 같은 시기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는데 그 분은 현대의학으로 수술하시고도 돌아가셨는데 형님은 산으로 들어와 원기를 회복하셨다. 요즘 아주 건강하시다. 아마 산의 기운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 같다."

산사람들은 부자다. 산의 마음처럼 뭐든지 나눠주고 퍼 주려고 할뿐 '아랫것들(?)'처럼 소유하려고 버둥거리지 않으며 산을 산이라 하고 물을 물이라 하지 거기에 수식어구를 붙여 넣지 않는다. 나는 이제서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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