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임 방주인 속명신수는 부방주가 된 소화타 장일정을 불러 외원에서 사용되는 붕대가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면서 세탁하는데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붕대에 물든 핏물을 빼는 방법을 말해 주었다.
그는 바다에서 나는 해초의 일종인 청각채(靑角菜)를 끓여서 말린 풀과 밥알을 으깨어 얼룩 부분에 대고 문지르면 핏물이 쉽게 빠진다면서 한번 해보라고 하였다.
오래 된 혈흔(血痕)은 무즙을 이용하면 된다 하였다.
무즙을 부드러운 천에 감싼 뒤 핏자국이 있는 부분을 톡톡 두들기면 신기하게도 혈흔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일부분에만 피가 묻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고, 전체적으로 피가 묻어 있을 때에는 짭짤한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핏물이 웬만큼 배어 나오면 빨면 된다고 하였다.
속명신수는 자신이 부방주일 때 수 없이 연구한 끝에 찾아낸 방법이라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붕대가 너무 더러워 보여 찝찝해하던 장일정은 애써 일러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장일정은 외원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채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던 모든 붕대들을 긁어모았다.
지난 수개월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엄청난 양이었다.
개중에는 핏물이 딱딱하게 굳은 것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속명신수가 가르쳐준 대로 만하면 모두 새것처럼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산더미 같이 모인 모든 붕대들은 펄펄 끓는 소금물 속에 푹 담가졌다. 이렇게 뜨거운 물에 담근 이유는 이러면 묵은 때가 잘 지워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워낙 양이 워낙 많았기에 이렇게 되기까지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외원 소속 하인 백여 명이 연신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왔으며, 소금을 풀었고, 불을 지피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에게 먹일 여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가마솥이 거의 백여 개에나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솥에 물을 채우는 데만 백여 명이 꼬박 한 시진 동안 물을 퍼와야 하였다.
이날 사용된 소금의 양은 정확히 다섯 섬이었다. 한 섬이 두 가마이니 가마솥 열 개당 한 가마니의 소금을 풀어 넣은 것이다. 물론 장작 역시 산더미만큼 소모되었다.
이래저래 적지 않은 비용이 든 셈이다. 그래도 붕대가 원상복구 되기만 한다면 새로 목면으로 만든 붕대를 구입하는 비용보다 훨씬 덜 들기에 이일을 시작한 것이다.
한참 후, 이제 웬만큼 핏물이 빠졌겠거니 생각하여 붕대를 건져냈던 장일정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룩이 빠진 것이 아니라 아예 눌러 붙어 있었던 것이다.
황급히 비벼보았으나 얼룩은 빠질 기미가 없었다. 붕대를 깨끗하게 하려다가 아예 못쓰게 만든 것이다.
마침 외원 시찰을 나왔던 속명신수는 막대한 비용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붕대가 깨끗해지기는커녕 더 더러워져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괴소(怪笑)가 머금어져 있었다.
핏물을 빼려면 소금물에 담그되 반드시 찬물에 담가야 한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그 즉시 응고되기 때문이다.
속명신수는 알면서도 찬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깜빡 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작정하고 말을 안 해준 것이다.
무천의방의 방주가 되기 위한 최종관문에서 속명신수는 분명히 장일정보다 먼저 관문을 돌파하였다.
장일정이 잘려진 팔을 이어 붙이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할 때 그는 선혈이 뿜어지고 있던 상처 부위를 재빨리 봉합하였다. 그래서 먼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관문은 누가 먼저 나오느냐가 관건이었다. 물론 환자가 죽으면 소용이 없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있다. 하지만 속명신수의 치료를 받은 환자는 비록 한쪽 팔은 잃었지만 멀쩡히 살아있다.
따라서 그가 방주가 되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날 속명신수가 무천의방의 차기방주로 발표되었고, 관례에 따라 장일정이 부방주가 된 것이다.
며칠 후, 평생을 바라던 방주에 취임한 속명신수는 무척이나 흡족해하였다. 그래서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는 의미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는 날이 있었다. 내원 소속 의원들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소문을 들은 직후였다.
― 이보게, 자네들도 그 소문 들었나?
― 무슨 소문?
- 차기 방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서 방주는 잘린 팔을 봉합만 하였고, 부방주는 접합을 하였다고 하네.
― 뭐어? 접합? 잘려진 팔을 붙였단 말인가?
― 그래, 아직 완전히 낫지를 않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접합 부위가 덧나지는 않았다고 하네. 게다가 팔을 움직인다고 하네.
― 세상에 맙소사! 잘린 팔을 접합하였다니… 그렇다면 소화타의 의술이 소문 이상이었다는 말인가?
― 하하! 부방주의 외호에 괜히 화타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줄 아나? 내가 보기엔 부방주의 의술이 신임방주보다 났다고 생각되네만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 쉬잇! 이 사람아, 자넨 목숨이 두 개인가? 속명신수 그 늙은이가 들으면 치도곤을 내릴 터이니 말조심하게.
― 허억! 아, 알았네.
속명신수가 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무천의방 외곽에 위치한 다루(茶樓)에서였다.
이곳은 진료에 지친 의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곳으로 휴식을 취할 때나 지인(知人)들을 접견할 때 주로 사용되는 곳이다. 반면 속명신수는 거의 방문하지 않는 곳이다.
아랫것들이 노는 곳에서 놀 수 없다면서 자신의 처소에 따로 다실을 준비하였으니 굳이 다루를 이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속명신수가 은밀한 소문을 들은 날은 자신에게 배속되어 있던 시비가 한 달에 한 번 있는 달거리로 인한 심한 생리통 때문에 자리를 비운 날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무림천자성의 제일호법인 조경지가 방주된 것을 축하한다며 예방(禮訪)을 하였다.
최근 들어 유난히 눈이 침침해지자 속명신수에게 진맥을 받을 겸해서 들린 것이다.
제아무리 무천의방의 방주라 할지라도 제일호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엄청난 신분상의 차이가 있기에 속명신수는 함부로 대접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귀빈에 걸 맞는 대접을 하려해도 시중들어줄 시비가 없기에 할 수 없이 다루로 안내한 것이다.
이곳에서 속명신수와 조경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아주 의례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대화가 들리는 순간 속명신수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이다.
이 순간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제일호법의 뇌리에는 장일정이라는 성명 석자가 각인되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