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68

용봉향로(龍鳳香爐) (3)

등록 2003.06.25 14:49수정 2003.06.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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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방주이자 부친인 천강성의는 아들이 차기 방주에 내정되었다는 발표를 하고 불과 사흘만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들이 가문을 빛내주리라 굳게 믿었건만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자 그만 이승의 생명 줄을 놓아 버린 것이다.


이때 그의 임종을 지키던 속명신수는 부친이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였다.

정신을 놓았던 천강성의는 죽음이 목전에 이르자 깊은 혼수 상태에서 잠깐동안 깨어나는 회광반조 현상을 보였다.

속명신수는 자신을 순순히 방주에 임명하지 않은 것도 서운하였고, 오랜 기간 동안 방주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부친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부친이 정신을 놓았다 하자 속으로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골골거리면서 오래오래 방주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부친을 진맥하고도 이제 너무 늙어 회생 가능성이 없으니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 효도를 하는 것이라며 다른 의원들의 접근을 막았다.


사실 천강성의는 손을 쓰면 능히 쾌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알아차릴까 싶어 다른 의원들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어쨌거나 속명신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리 사흘간이나 부친의 병상을 지켰다.


피곤 때문에 졸고 있던 속명신수는 부친의 나직한 신음에 문득 깨어났다. 이때 낮으면서도 가느다란 유언이 있었다.

"으으! 시간이 아니라 결과를 봤어야…, 차기 방주는 그 아이가 되야… 끄응!"

이것이 그가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속명신수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여 왜 이런 이상한 말을 남겼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상념이 있었다.

시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낸 것이다. 하여 최종관문을 판정하였던 의원을 불러들였다. 그는 최종관문의 결과를 본 유일한 인물로 부친의 심복이었던 늙은 의원이었다.

천강성의 생전에 시간과 관계되었던 문제는 최종관문 밖에 없었기에 그를 부른 것이다.

그 결과 봉합과 접합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속명신수는 팔이 잘린 환자의 잘린 부위를 서둘러 지혈하고 봉합만 하였으므로 한쪽 팔이 잘린 채 나아가고 있었고, 장일정이 손을 보았던 환자는 잘린 부위를 접합시켰으므로 두 팔이 멀쩡하게 달려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장일정이 손을 보았던 환자를 불러들였다.

그 결과 시간이 관건이 아니었다면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아닌 소화타 장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접합을 시켰는지 비록 아직 통증은 느끼지만 움직이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듯하였다. 힘줄과 혈관, 그리고 뼈마디까지 완벽하게 접합하기 전에는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날 밤, 마지막 관문을 담당하였던 늙은 의원과 장일정이 치료한 환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흉수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로 그를 살해하였는지는 영원한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속명신수가 무천의방의 체면이 더럽혀진다면서 수사를 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한 결과이다.

며칠 후, 속명신수는 외원 순시를 나왔다가 피 묻은 붕대 때문에 골머리를 썩던 장일정을 보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로 붕대에 남아있는 혈흔을 지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누가 보아도 경험 많은 전임 부방주로서 후임자에 대한 자상한 배려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배려가 아닌 흉계였다.

그렇기에 오늘 장일정이 거친 돌 바닥을 무릎으로 걷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으으윽! 으으으윽! 커억! 으으으윽!"

선혈과 흙먼지가 뒤엉킨 무릎으로 조금씩 나가갈 때마다 장일정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지나온 곳은 시커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선혈과 흙먼지가 엉킨 것이다.

그런 그의 곁에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줄 몰라하는 여인은 무천의방에 배속되어 있는 의녀(醫女) 가운데 하나였다.

경국지색이나 천하절색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모자란 점이 많지만 그렇다고 아주 박색(薄色)은 아닌 그녀는 마음씨가 비단결 같아 유심선자(柔心仙子)라 불리는 남궁혜(南宮慧)였다.

그녀는 무림의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의 여인이지만 여종의 몸에서 난 여인이었다. 다시 말해 천출(賤出)이었다.

때문에 많은 설움을 당하면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난히 학문을 좋아했던 그녀는 배움에 목말라 틈만 나면 서책을 들여다보려 하였으나 남궁가에서는 천출 주제에 학문은 무슨 학문이냐면서 허드렛일만 시키려 하였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남궁혜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궁세가에 한 떼의 무천의방의 소속 의원들이 방문을 하였다. 천하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의원들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던 무림천자성에서는 매년 정파무림인들의 안녕을 위하여 의원들을 파견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 해는 남궁세가의 차례였다. 그래서 무천의방 소속 의원들이 무더기로 방문한 것이다.

그때 왔던 의원 가운데 하나가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남궁혜를 보고 몇 마디 말을 걸어 보았고, 그녀의 총명함이 아까웠던 그는 그녀를 무천의방의 의녀로 키우겠다며 데리고 왔다.

그 의원이 바로 마지막 관문을 담당하였던 늙은 의원이었다.

그의 사후(死後) 본시 내원 소속 의녀였던 그녀는 외원으로 보내졌다. 매일 매일 슬피 울기만 하다 강등된 것이다.

외원에 배속되고 난 후에도 그녀는 일손을 놓고 울기만 하였다. 장일정은 몇날 며칠 동안 슬프게 흐느끼기만 하는 그녀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자신이 진료할 때 곁에서 돕도록 하였다.

그녀는 내원에서 탕약 달이는 일만 하였다. 하여 누군가의 곁에서 일손을 돕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금방 적응해갔다.

물론 장일정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우스개 소리를 하거나 실없는 소리를 하여 웃기곤 하였던 것이다. 일과 후에도 슬퍼할 겨를을 없애기 위하여 의서(醫書)를 읽도록 하였다.

장일정은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병을 고쳐주고 싶은 의도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녀가 무천의방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의술을 익히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데리고 온 늙은 의원은 병약한 데다가 워낙 바빴기에 제대로 의술을 전수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의술은 기초는 닦여 있으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마음대로 의서를 읽을 수 있게 하였더라면 나아졌을 것이나 미처 그런 배려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남궁혜의 총명함은 금방 드러났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당구삼년폐풍월(堂狗三年吠風月)이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산 까마귀 염불을 한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의 절은 심산유곡에 있고 산 까마귀 역시 그런 산에 산다. 따라서 무엇이든 가까이서 보고 들으면 대강은 알게된다는 말이다.

남궁혜는 무천의방에 몸 담은지 대략 삼 년 정도 되었다.

그녀는 눈썰미도 좋은데다 귀동냥한 것들도 상당수 있어 그런지 의술의 대강은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장일정은 편한 마음으로 환자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남궁혜는 부방주라는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는 장일정이 자신에게 특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그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놓고 그럴 수는 없었다.

너무도 부끄러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 이제 일 일곱!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짓는 그런 나이이다.

아무튼 남궁혜는 장일정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마치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날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장일정을 단순한 상전 이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새 그녀 마음속의 우상이 되었고, 너무도 은애(隱愛)하는 연인이 되었다.

물론 장일정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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