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69

용봉향로(龍鳳香爐) (4)

등록 2003.06.26 14:26수정 2003.06.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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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런 우상이자 연인의 무릎이 까져 선혈이 낭자하고, 연신 신음을 토하자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다.

"부방주님!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요. 그러니 저기까지는 그냥 가세요. 예? 흐흑! 제발…, 어서 일어나세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저기까지는 그냥 가세요. 예?"


남궁혜의 말에도 불구하고 장일정은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거친돌에 의하여 하의가 찢겨졌고 무릎에서는 선혈이 샘솟듯 솟고 있으며, 거기에 흙이 뒤범벅이 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이가 갈릴 정도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내 대장부로서 한번 한 약속은 약속이었다.

부방주에 취임하면서 규율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바 있었다.


그 규율이라는 것의 골자는 무림천자성과 무천의방에 해가 될만한 일을 아예 생각조차 않겠다는 것과 상명하복을 철저히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속명신수가 명을 내린 이상 따르는 것이 도리인 상황이다.

속명신수는 붕대를 못 쓰게 한 건을 사유로 이곳 산책로를 한 바퀴 돌 것은 명하였다. 물론 무릎걸음으로 걷는 것이며, 중도에 쉬거나 음식을 먹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하루에 다 못하면 다음 날 처음부터 다시 하라 하였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산책로의 총 길이는 어림 잡아도 천여 장은 족히 된다. 그렇다면 십 리에서 조금 빠지는 엄청난 거리를 무릎으로만 걸어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 사람 잡을 일이다!

"부방주님! 소녀가 아무리 살펴봐도 여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서 저기까지만 걸어가세요. 예? 그러다 무릎을 아예 못쓰게 되겠어요. 흐흑! 제발요!"

어쩔줄 몰라 앞뒤로 왔다갔다하던 남궁혜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장일정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선친의 엄한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맡은 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꾀나 피우는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니 당장 나가거라."


이 소리는 어린 시절 자신이 맡았던 마굿간 청소를 게을리 하였을 때 들은 불호령이었다. 당시 장일정은 이회옥과 더불어 토끼 잡는 덧을 놓느라고 며칠 동안 청소를 못한 상황이었다.

마굿간을 청결하게 유지하여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들어 지저분해지면 혼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토끼 잡는 재미에 잠시 한눈을 팔다 제대로 걸려버린 것이다.

이날 장일정은 엄동설한이었지만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모친인 이형경이 하나뿐인 아들이 잘못하면 얼어죽는다면서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부친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하여 이날 장일정은 말에게 먹일 건초로 가득한 창고의 한 구석에서 오돌오돌 떨며 밤을 지새워야 하였다.

대흥안령산맥의 겨울은 정말 이가 갈릴 정도로 춥다. 하지만 건초로 그득한 창고 안에서 불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엄청난 대화재가 발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추위에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던 장일정은 궁여지책으로 짚더미 속으로 파고들었다.

쫓겨날 때 제대로 의복이나 걸쳤으면 덜했겠으나 잠자리에 들려다가 쫓겨나 얇은 적삼만 걸친 채였기 때문이다.

이날 장일정은 쥐벼룩의 등살을 톡톡히 겪었다. 어찌나 긁어댔는지 온 몸에서 선혈이 나올 정도였다.

이날 이후 장일정은 무슨 일은 하던 절대 꾀를 피우지 않았다.

게다가 북의와 남의로부터 의술을 전수 받을 때 그들 둘은 이구동성으로 의술을 익힘에 있어 절대 꾀를 부리지 말라하였다.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들 사형제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일이므로 늘 정도를 걸어야 한다 가르쳤다.

아무튼 장일정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생각하였고, 사내로서 요령이나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남궁혜가 아무리 만류해도 무릎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흐흑! 부 방주님, 이러다 큰일나셔요. 흐흑! 그러니 일어나서 흐흑! 아니면 쉬었다라도 하세요. 부방주님 무릎이 다 깨져서 피가 철철 나잖아요."
"으윽! 으으윽! 허억! 으으으윽!"

남궁혜의 안타깝다는 소리에도 장일정은 고통에 찬 심음을 토하면서도 계속 전진했다. 어찌되었건 오늘 중으로 다 돌지 못하면 내일 처음부터 다시 돌아야하기 때문이다.

"으윽! 소생은 괜찮소이다. 그나저나 아침도 못 먹었을 터이니 가서 요기라도 하고 오시오. 소생은, 으윽! 허어어억!"

장일정은 무릎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했다. 아마도 상처 부위에 작은 돌 쪼가리가 박힌 모양이다.

"거봐요! 아프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방주께서 물어보시면 부방주님이 한 번도 안 쉬고 다 돌았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어서 일어나세요. 예?"

말을 하는 남궁혜는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우려는 듯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웠다.

그녀는 현재 제대로 형벌을 이행하는가 여부를 확인하는 감시자였다. 속명신수가 그녀로 하여금 확인하라 명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속명신수가 꾸민 흉계의 일환이었다.

방주에 취임한 이후 속명신수는 자신이 작성한 살생부에 기록된 의원들을 하나 하나 내쫓는 중이었다.

무천의방의 업무 가운데에는 진귀한 약재를 수집하는 것도 있다. 세상의 온갖 희귀한 것들만 기록해 놓은 산해경(山海經)이나 대황경(大荒經), 혹은 기물총요(奇物叢要)나 기진이초집성록(奇珍異草集成錄) 같은 것에나 기록된 것들을 채집 보관하는 것이다.

그중 산해경 서차삼경(西次三經)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 서남쪽으로 삼백팔십 리를 가면 이곳을 고도지산이라고 한다. 색수(嗇水)가 흘러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서 제자지수로 흘러들어 간다. 또 도수가 흘러나와서 남쪽으로 흘러서 집획지수로 흘러들어 간다.

이 산의 양지바른 곳에는 붉은 색을 띈 밤이 많이 나고, 응달진 곳에는 은과 황금이 많다.

짐승이 있는데 그 모습은 사슴 같으나 꼬리가 희고 말의 다리와 사람의 손이 달려 있으며 뿔이 네 개 있다.

그 이름을 앵여라고 한다.

새가 있는데 그 모습이 솔개 같으나 사람의 발이 달려있다. 그 이름을 수사라 하는데 이것을 먹으면 목에 생긴 혹이 낫는다.

西南三百八十里, 曰皐塗之山, 嗇水出焉, 西流注于諸資之水. 塗水出焉, 南流注于集獲之水. 其陽多丹栗, 其陰多銀黃金. 有獸焉, 其狀如鹿而白尾, 馬角人手而四角, 名曰鸚如. 有鳥焉, 其狀如 而仁足, 名曰數斯, 食之己 . >

맨 마지막에 언급된 수사(數斯)라는 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새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목에 생긴 혹을 없애는데 특효라니 잡으러 다닐 수밖에 없다.

현재 무천의방에는 이 새가 한 마리 있다. 언제고 성주 일가 가운데 목에 혹이 나면 사용하려고 기르는 것이다.

이것을 잡기 위하여 무천의방 소속 의원 둘이 목숨을 잃었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잡느라 장장 십팔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속명신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의원들을 이런 것들을 잡는 곳으로 보내버렸다. 산해경 등에 언급된 희귀 동식물이나 광물은 현세(現世)에 없는 것도 부지기수이다.

따라서 어쩌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내는 것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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