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를 아시나요?

어느 최소주의자의 삶

등록 2003.07.06 08:58수정 2003.07.0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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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차도 없고 면허증도 없어서 모처럼의 휴일에도 차를 몰고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야산이나 들녘에 나가 휴일을 보내기가 일쑤이지요. 그러다 보니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존재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끔은 차가 없는 것이 이런 행운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동천에 핀 개망초
동천에 핀 개망초안준철
요즘 같은 여름철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풀꽃으로 개망초가 있습니다. 너무 흔해서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어느 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꽃입니다. 제가 개망초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학교에서 만나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꽃의 단정하고 소박한 이미지 때문입니다.

개망초

너는 피어 있지 않고 서 있다
산비알이나 바위너설이나
묵정밭이나 길섶을 가리지 않고
억센 덩굴손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음습한 거미줄에 휘감기기도 하면서
너는 피어 있다기보다는 서 있다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한 때는 네게 낮은 시선을 준 적이 있었다
숨이 멎도록 이쁘지 않은 게 너의 미덕이라고
가던 길을 멈추고 반 무릎 자세로 앉아 널 칭송하며
사실은 내 모습에 취해 너를 바라 본 적 있었다
아이들에게 교만을 눈치 채이고 돌아가는 길에
이제야 너의 소박함이 경이로움인 것을 안다
해마다 튀밥 같은 꽃을 머리에 이고서도
꽃이 아닌 풀이 되고 싶은 너의 마음을 안다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우북하게 풀 우거진 곳에
계집아이 입가에 핀 마른버짐 같은 꽃을 수놓고
눈길 흐린 사람 있나 두리번거리며
서서 피어 있는 그 마음을.

* 자작시

제가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 덕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실업계 학교에서 교편을 잡지 않았다면 그런 행운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세계의 일인자가 되어 이름을 날릴만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도 아니어서, 저는 오히려 그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소박한 생명력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길에 만난 민들레
산책길에 만난 민들레안준철
행복이 어디서 오는가?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행복이 오는 길목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행복이 오는 길목을 일러주는 길잡이 노릇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이 어디서 오는가? 언젠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중에서 거의 90퍼센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그러니 매일 반복되는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들여 멀리 여행을 하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보배로운 눈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요 며칠 새 저는 아내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고 거의 매일 퇴근 후에 아내와 함께 저녁 나들이를 나선 것입니다. 여름철이라 해가 길어 저녁을 들고나서도 한참 해가 남아 있었습니다. 만약 차가 있었다면 한 시간 남짓이면 당도할 수 있는 섬진강이나 지리산 자락에 다녀왔을 터이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어서 아내와 손을 잡고 가까운 곳을 산책한 것입니다.


향림사 가는 길에 만난 작은 폭포
향림사 가는 길에 만난 작은 폭포안준철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저녁 나들이를 매일같이 하다보니 멀리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어서 다니다 보니 몸에도 좋고, 공해를 유발할 필요가 없어 고마운 자연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아 좋았습니다.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깊은 산중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진귀한 풍경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시인은 자신을 스스로 최소주의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최소주의자란 자신의 행복추구를 위해 최소한의 자연과 물질을 사용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우리 나라는 최대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휴일을 즐기기 위해 차량을 동원하고 먼 곳으로 가서 최고의 풍경을 구경하고 돌아와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 훼손되는 자연으로 인한 피해는 후세 사람들의 몫으로 떠넘기고 말겠지요. 자연은 금세의 사람들이 후세 사람들에게 임대하여 빌려쓰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최소주의자들은 그런 지혜와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요즘 어른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 첫째 닮은꼴입니다. 돈이야 많이 벌수록 좋고,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돈이 없어도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무지입니다. 제가 아내와 저녁 산책을 하면서 누리는 행복은 돈과는 무관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우리 내외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재산이 갑자기 생긴다면 아마도 시시한 저녁 산책으로 시간을 보내지는 않겠지. 그러다 보면 소박한 저녁 나들이를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감수성이랄까, 그런 내적인 능력도 곧 퇴화되고 말겠지'

누가 종이배를 만들어 놓았을까?
누가 종이배를 만들어 놓았을까?안준철
언젠가 저는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최소주의자의 삶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현재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 그런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소박한 삶이 주는 행복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교사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꼭 최고가 되어야 하고, 큰물에서 놀아야만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교육은 많은 평범한 아이들에게 좌절감만 안겨줄 따름입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날이 약간 흐렸어도 비는 뿌리지 않았는데 수요일인가 목요일에는 가는 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내외는 우산을 들고 동천을 거닐었습니다. 비오는 저녁 동천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가는 비에 젖어 바람에 나부끼는 한 무더기의 개망초꽃도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맑은 날이 아니어도 생의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작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비 부부인 미혼남녀들을 위한 일종의 부부학 강의를 부탁 받은 적이 있는데 그날이 바로 강의 당일이었던 것입니다. 나흘째 계속해오던 저녁 나들이를 잠깐 뒤로 미루고 부랴부랴 강의 원고를 챙겨 젊은 선남선녀들을 만나러 집을 나섰습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주체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주제로 얘기를 끌어가다가 말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귀한 것이 같은 사람끼리 만나야 행복합니다. 제 아내는 작고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그런 여자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내를 많이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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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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