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참판댁에서 찾은 아버지의 토담

소설 <토지>의 배경 하동군 평사리에서

등록 2003.07.09 17:57수정 2003.07.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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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마지막날 꿈속에서 서른세살 내 나이의 아버지가 쌓아 올렸다는 유년의 돌담길을 너무도 또렷하게 보았다.

남도 땅 들녘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붉은 황토와 개울가에서 바지게(거름이나 흙, 수확물 등을 옮길 때 지게 가지에 얹어 놓고 사용하는 운반구)로 퍼올린 돌무더기를 얼기설기 쌓아 올린 자그마한 토담이었다.


아버지의 토담에 비해 너무 높고 화려한 최참판댁 토담
아버지의 토담에 비해 너무 높고 화려한 최참판댁 토담김대호
그리운 사람일수록 꿈의 정령이 허락하지 않는지 돌아 가신지 8년이 다 돼가지만 아버지는 좀체 내 꿈을 찾아오지 않는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 한줄기가 '주르르' 흐르고 잠에서 깬 나는 동이 틀 때까지 밤꽃냄새 진동하는 지리산의 밤을 즐겼다.

아마도 날이 새면 <토지>의 '서희와 길상'이 거닐었음직한 '토담길'을 통해 옛시절을 훔쳐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음이리라.

금서라서 더 맛나게 읽었던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보성군 벌교읍에 가면 소설에 묘사됐던 남원장, 정도가네, 금융조합, 횡계다리, 김범우의 집, 자애병원, 소화다리, 서민호 야학당, 현부자네 고가와 벌교 철다리를 그대로 볼 수 있다.

서희아씨가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던 누각
서희아씨가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던 누각김대호
특히 천지 모르고 토담을 희롱하며 갈래를 펴는 담쟁이 넝쿨이며 솔이끼 머금은 세월의 흔적을 확인하게 되면 문득 시간은 역류하고 '사랑밖엔 난 모르는' 소화가 '연분홍 치마를 꽃바람에 휘날리며' 골목을 휘돌아 올 것 같은 착시에 빠지곤 한다.


그대는 바다입니까 밤마다 머리맡에 그리움의 파도소리 철썩입니다 잠 못 들어 지새우는 나날 내 이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묻히면 그대 내게 밤낮으로 달려오겄지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그대는 바다입니까·길상-김영동 作)

그러나 다음날 '최참판댁'에서 본 '돌담길'은 너무도 생경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의 무대인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 댁'은 소설에서 선생이 묘사한 공간들을 3000여평의 부지를 매입해 한옥 14동을 지어 인위적으로 복원한 곳이다.

최참판댁 정자
최참판댁 정자김대호
김영동님의 '밤마다 머리맡에 그리움의 파도소리로 잠 못 들어 지새우는' 초가토담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바윗덩이로 규칙적으로 쌓아 기와로 이엉을 얹었고 사람 키보다 훌쩍 높아 바깥 세상과 경계지어 담을 넘어 갈래머리 곱게 빗은 '서희아씨'를 훔쳐본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바보처럼 나는 왜 참판댁에 벌교에나 있음직한 초가이엉 얹은 토담이 없다고 트집을 잡는 것일까?

아마도 강진 산골 촌놈인 내가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할 위압적인 '최참판댁'의 규모에 지레 겁먹은 탓도 있을 터이지만 못나게도 엉뚱한 곳에서 '흑백'의 옛 기억을 더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중략 …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의 성탄제(聖誕祭)에서-


산 위에서 바라본 최참판댁
산 위에서 바라본 최참판댁김대호
세월의 흔적을 느끼는 것은 귀소본능인가 보다. 지금은 방영을 멈추었지만 김 회장과 일용엄니 구수한 입담으로 기억되는 '전원일기'의 양촌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내 고향 강진에 대한 '귀소본능'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도회지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총천연색으로 나를 압박해 오던 문화적 충격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황토 흙무더기로 얼기설기 쌓아올린 '돌담길'은 세상의 무게를 몸소 감당하고 막아주던 아버지의 너른 품 같은 든든함이었다.

세월은 흘러 토담을 쌓던 '서러운 서른 살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고'서야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최참판댁 초당
최참판댁 초당김대호
여섯 아이를 바지게에 짊어지고 세상을 향한 '부적'처럼 토담을 쌓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든든한 방어막을….

아들로만 살아 온 나도 이젠 이 땅을 살다간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고 이 땅을 살다갈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할 든든한 토담을 쌓아야 하나 보다.

최참판댁 본채
최참판댁 본채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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