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미디어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알고있음'이 생에 적용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하여, 우리는 죽음을 삶과는 외떨어진 공포나 서러움 따위로 인식하기 일쑤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류명환의 첫 시집 <서쪽으로 길이 있다>(상상미디어)에서 만나는 진술은 익숙하면서도 생경하다.
그 날 사내와 나는 말없이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석양 그늘로 흘러가는 오리떼를 턱 괴고 바라본 것뿐이었는데, 몇 날 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이 세상에서 겪은 가장 슬픈 이야기보다 더 슬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던 것을 슬퍼하였고… (위의 책 중 '부음' 부분)
강원도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함께 오리떼를 바라보던 사내의 갑작스런 죽음. 그러나 그 죽음은 우리의 경험 '밖'이 아닌 '안'에 있었다. 갑작스런 한 사내의 사라짐. 그러나, 그 사라짐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슬프지만, 엄연한 명제. 바로 이때 류명환은 또 다른 사라짐 혹은, 죽음을 떠올린다.
무망(無望)도 희망이어라 // 절망하여 단 한번을 무릎 꿇어본 일이 없고 / 내 안에 적을 지님이 없었으되 / 호강한 것이다 // 살아야겠다 (위의 책 중 '자살 고(考)' 전문)
스스로 택한 죽음이거나, 어쩔 수 없이 맞아야했던 죽음이거나 그 차이는 없다. 지상에서의 짧은 생을 마무리하고, 천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인 동시에 인력(人力)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우주의 순리.
이것을 깨달은 시인은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로 죽음을 노래한다. 그 노래 속에는 류명환이 태어난 고향, 강원도 영월의 바람소리가 묻어있다.
그리고… 오래 면벽 중이던 누가 결가부좌를 풀고 유언을 물어오거든 // 단조로운 삶이 못내 겨웠음을 / 망자(亡者) / 즈음사 깨달은 바 // 일몰의 골짜기를 갸웃갸웃 되짚어 갔더라고 // 짐작이듯 / 근황만을 전함이 옳겠다 (위의 책 중 '묘비명' 전문)
류명환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잠언. "어느 죽음이 감히 삶보다 따뜻하랴."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아니, 앞으로도 삶보다 따뜻한 죽음을 만나지 못하리라.
무엇이 그 남자의 모두를 파괴했는지
- 김인숙의 <그래서 너를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