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돌멩이를 두 개 던져 주세요!"

영화 속의 노년(57) : 〈체리 향기〉

등록 2003.08.02 09:28수정 2003.08.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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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절,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서면 발아래 보이는 불켜진 창들이 그렇게 따뜻하고 안온해 보일 수 없었다. 사랑한다고 믿는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저런 불을 밝힐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 불빛은 늘 아직은 갖지 못한, 그래서 내 것이 될 것 같지 않은 막연함으로 다가오곤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의 산책로를 걸으며, 혹은 나무 밑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불켜진 아파트 창들을 올려다본다. 아, 나처럼 다들 저렇게 불 밝히고 사는구나. 나처럼, 우리처럼 저들도 때론 웃고, 때론 울며, 때론 감사와 행복으로, 때론 고통과 절망으로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있겠구나 생각하곤 한다.

여기 죽고 싶은 한 남자가 있다. 나무 아래 구덩이는 이미 준비해 놓았고, 수면제를 먹고 그 구덩이 안에 누우면 끝이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난 내 몸을 흙으로 덮어줄 사람만 있으면 된다. 누가 그 일을 해줄까…. 남자는 차를 몰고 길을 나선다.

시신 위로 흙 스무 삽만 퍼서 덮어주면 군인의 6개월치 급료가 넘는 20만 토만을 주겠다고 하지만, 앳된 얼굴의 군인은 거절을 하더니 도망가 버린다. 학교에서 근로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하고 있는 젊은 신학생은 죽음을 도와줄 수는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며 설득하려 드는 신학생에게 남자는 이야기한다.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당신이 이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러면서 불행하게 살면서 주위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묻는다.

이제는 너무 지쳐 하느님의 결정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결정한 것이니까, 설교나 관심은 필요 없고 자신의 시신 위에 흙을 덮어주는 도움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남자에게 젊은 신학생의 설득은 전혀 와닿지 않는다.

여기까지 영화는 이 남자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 지역의 풍경이 천천히 길게 이어진다. 앳된 군인과, 또 젊은 신학생과 이야기하는 곳도 다 이 남자의 자동차 안이다. 이 남자에게 삶은 이미 발 담그고 살아갈 곳이 아닌 것이다.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 같은 것일 뿐이다.

남자는 드디어 도와주겠다는 노인을 만난다. 도우려면 성의를 다해 제대로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는 괜찮지만, '친구를 도우려면 다른 방법, 즉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노인의 이야기에 남자의 얼굴은 굳어지고 입은 더 굳게 닫혀 버린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한다며, 노인은 마땅치 않은 얼굴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남자를 향해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혼 직후였던 아주 오래 전, 사는 일에 너무 지쳐서 끝장을 내기로 하고 노인은 새벽 동트기 전에 밧줄을 차에 싣고 뽕나무 농장으로 간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밧줄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을 때 체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향기와 부드러움, 과즙이 가득 찬 맛….

그 때 태양이 떠오르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해 흔들어 주니 체리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아이들은 그 체리를 주워 먹는다. 행복감에 젖어든 노인은 체리를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때까지 자고 있던 아내가 일어나 맛있게 체리를 먹는다.

자살하러 떠났지만 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체리 덕분에 생명을 구했노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고. 다만 내가, 내 마음이 변한 것이라고.

남자는 노인의 이야기가 듣기 싫어 나오느니 한숨뿐이고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노인은 아침 하늘, 새벽의 태양, 저녁 노을, 달과 별과 사계절의 각기 다른 과일들, 솟아오르는 샘물, 차가운 시냇물을 이야기하며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렇지만 정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먼지 나는 길을 돌고 돌아, 다음 날 새벽 구덩이로 가서 시신 위에 흙을 덮어주기로 굳게 약속한 노인은 자신이 박제사로 일하고 있는 자연사박물관으로 들어간다. 혼자 남은 남자의 눈에 사람 사는 집과 건물들이 들어온다.

노인을 다시 찾아온 남자는, 내일 새벽 구덩이 속에 누워 있을 자신에게 돌멩이 두 개를 던져달라고 부탁한다. 혹시 그냥 잠이 든 것인지도 모르니까. 노인은 돌멩이 세 개를 던지겠다고 답한다. 밤이 오고 남자는 계획대로 구덩이 속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먼지 나는 황량한 사막길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35년 동안 이 사막 지역에서 살았다는 노인이 남자에게 권한 길은 비록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노인과 마지막 대화를 하고 난 남자는 비로소 차에서 내려 발로 걷는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모습도 보이고, 도시의 하늘 저 편으로 넘어가는 해는 참으로 아름답다.

세상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지금 좋은 것이 나중에 달라질 수 있고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을 수도 있다는 노인의 이야기는, 수많은 갈래길을 거쳐 아름다운 길을 찾아내고 가야할 길을 확실히 알게 된 노인의 지혜를 그대로 담고 있다.

때로는 두 사람이 불 밝히고 살 수 없어 고통스럽고, 때로는 이미 밝힌 불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또 다른 고통일 수 있다. 삶이란 가지지 못해 괴롭고, 또한 가진 것이 만족스럽지 않아 괴로운 법. 힘들고 괴로워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돌멩이 두 개를 던져 나를 깨워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체리 향기에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본 노인은 영화 속에 머물지 않고 우리들 삶 속으로 걸어 나와 우리 곁에서 자신의 씁쓸했지만 괜찮았던 생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내게 체리 향기가 되어 줄지는 모르지만, 나이듦의 지혜는 체리 향기 속에서 삶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고 확실히 가르쳐주고 있다.

(체리 향기 The Taste of Cherry, 1997 /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출연 호매윤 에르샤디, 압둘라흐만 바그헤리, 압신 코르시드 바크티아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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