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회사는 여름휴가도 없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0>여름휴가

등록 2003.08.05 10:48수정 2003.08.0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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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일 이모네가 외할머니댁으로 여름휴가를 온대."
"그럼 이모부랑 소영이, 준영이도 다 오겠네?"
"아니. 이모부는 못 온대."
"왜?"
"일거리가 없다고 얼마 전부터 서울에 올라갔대."


지난 금요일 오후, 큰딸 푸름이한테서 우스개 반, 비아냥 반이 섞인 전화가 왔다. 푸름이의 생각으로는 바닷가나 계곡으로 여름휴가를 떠나야지, 어떻게 시골도 아닌 도심에 사는 외할머니댁으로 여름휴가를 올 수 있느냐는 투였다. 그리고 내게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이런 말을 남겼다.

"아빠! 엄마 휴가가 언젠지 알고 있지?"
"으응. 근데 언제부터라고 했더라?"
"다음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잖아. 그때 엄마랑 경주에 간다."
"그래. 와. 감포 앞바다에 가서 문무대왕 수중릉도 보고, 감은사지도 보게. 근데 그때 아빠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는 없어."
"아니, 왜?"

내가 일하는 곳은 불국사 아래에 있는 제법 큰 사찰이다. 이 사찰은 내가 맡은 편집실과 경비, 청소원 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스님과 불자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여름휴가 같은 날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특히 편집실을 제외한 다른 식구들은 국경일이나 일요일도 없이 24시간 절에서 상주했다.

또 이 사람들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부르는 설날이나 추석이 되어도 고향으로 가기는커녕 오히려 손님맞이에 더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게다가 지난 주말부터 이곳에서도 전국에 있는 불자하계수련대회를 한다고, 말 그대로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큰 스님께 여름휴가를 내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주말마다 집으로 내려가는 내가 말이다. 그래. 지난 해 이맘 때에는 그 수련회 때문에 아예 여름휴가를 이곳과 토함산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 해와는 달리 수련회의 일정이 많이 줄어들어 내가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올해 아내의 여름휴가는 참으로 애매하게 잡혀 있다. 주말을 끼고 여름휴가를 내었으면 참으로 좋았으련만, 여름휴가 3일이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가 아닌가. 하긴 백화점에 나가는 아내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불황에, 그나마 사람들이 제법 몰리는 주말에 백화점 매장을 비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빠! 이모네도 우리따라 경주에 간대. 그리고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께서도 같이 가실 지도 모르고."
"그래. 이거 큰일인데."
"왜?"
"아빠는 일을 해야 되잖아."
"그 회사는 여름휴가도 없어?"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근데 이를 어쩐다? 명색이 맏사위라고 하는 내가 장인어른과 장모님까지 오신다는 데, 그냥 가만 있을 수도 없고. 하긴 어쩔 수 없지 뭐.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그래. 그나마 이번 주중에는 수련대회가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화요일이라. 근데 감포 바닷가 근처에 민박을 할 집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민박집이 있어도 바가지 요금이 극성을 부릴 게 뻔할 텐데, 이를 어쩐다? 하여튼 지난 해에 이어 올해 여름휴가도 그냥 쉬이 넘기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특히, 경주 있으면서 방 하나도 제대로 못구해 놓았냐는 아내의 바가지는 또 어쩌지?

옳커니! 왜 지금껏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 나의 경주 길라잡이 신 선생이 있지 않는가. 신 선생한테 부탁을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을. 그래. 그도 안 되면 저녁나절에 신 선생을 모시고 감포에 한번 다녀오면 되지 않겠는가. 신 선생은 감포 사람들도 훤하게 잘 알고 있으니까.

"예. 접니다. 지금 어디 계신가요?"
"집이니더. 근데 왜요? 지금 하도 더워서 샤워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30분 뒤에 집으로 올라갈게요."
"그렇게 하이소. 근데 이 더운 날, 설마 남산에 답사 가자고 하는 거는 아니겠지요?"
"남산이 아이라 시원한 감포로 답사를 갔으면 해서요. 가서 맛있는 생선회라도 한 점 먹게."
"그거 좋지. 근데 이 선생이 어쩐 일로?"

그렇게 해서 신 선생과 나는 감포로 향했다. 근데 이게 웬 일인가. 신 선생 말마따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엑스포 전시장 앞에서 탄 감포행 버스가 덕동호를 지나고 막 추령터널을 벗어났을 때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제법 굵은 빗줄기로 봐서 쉬이 그칠 그런 비도 아니었다.

"이 추령터널을 막 뚫었을 때도 비가 자주 왔니더. 그런데 그때 키가 아주 작은, 용한 무당이 와서 뭐라 캤는지 아능교?"
"…"
"아, 용꼬리를 잘라서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니더. 그래가꼬 이곳에서 큰 굿을 한 적도 있었니더."

기가 막혔다. 하필이면 이때 비가 온단 말인가. 아까 출발하기 전에만 해도 하늘이 멀쩡했건만. 그때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울긋불긋하게 앉아 있는 저 사람들도 아마 감포 주위로 피서를 가는 모양이었다.

"니 혹시 용띠 아이가?"
"아…아입미더. 지는 토끼 띠 아인교."
"거 참, 이상하게 니캉 오데 갈라카모 우째서 자꾸 비가 오노?"
"날씨 한번 더럽네."
"그라이 예로부터 믿을 수 없는 기 여자 맴 하고 여름 날씨라 안 카더나."

약간 뜨끔했다. 왜냐구? 바로 내 아내가 50대 아주머니가 말하는 그 용띠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용띠인 아내와 함께 어디 여행을 가더라도,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린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잔뜩 찌푸린 날이 여행을 하는 동안 맑게 개인 적이 더 많았다.

"아, 그라고 보이 오늘이 칠월 칠석 아이가?"
"그렇구먼. 그런데 올개는 견우 직녀가 벌건 대낮에 만나는 가베."
"아, 하늘나라라꼬 캐서 맨날 옛날 그대로 있것나. 인자는 은하수에도 오작교를 철거하고 반듯한 은하대교를 놨것지."

a 전촌해수욕장

전촌해수욕장 ⓒ 경상북도

버스는 이내 감포 입구 전촌해수욕장 앞에 닿았다. 신 선생과 나는 급히 버스정류소 옆에 웅크리고 있는 00슈퍼마켓이란 간판이 붙은 구멍가게로 들어가 일단 비를 피했다. 그 구멍가게 한켠에는 막걸리를 먹기에 딱 좋아 보이는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었다. 신 선생과 나는 눈짓으로 비가 그칠 때까지 그 조그만 탁자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쉬이 그칠 비는 아닌 것 같니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그래도 안 되면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방은 우짜고?"
"할 수 없죠, 뭐. 그날 당일치기로 알아보는 수밖에."

하지만 비는 저녁 때가 지나도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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