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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
저 금형만 바라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마구 떨리고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아
배 고파
프레스기 앞에만 앉으면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떨려오면서
별들이 반짝거려
달아나고 싶어
진종일 검은 햇살만 쏟아지는
이 무시무시한 공단이 없는 곳으로
마구 도망치고 싶어
-이소리 <공돌이의 꿈>
이듬해. 1979년 봄날, 공장 밖의 햇살은 몹시도 따사로운데, 공장 안의 햇살은 늘 추웠다. 이상하게 공장 안에만 들어오면 으실으실 추워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장 밖에만 나가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훈훈해지면서 배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프레스실의 모든 공정을 부서장 없이도 스스로 처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웬만한 안전사고 요인도 스스로 제거하거나 프레스실 주임에게 제안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내가 같이 프레스실에서 근무했던 다른 노동자들보다 훨씬 빠른 시일 안에 프레스실의 일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예방조치였다. 조금 더 폭넓게 말하자면 주변 동료들의 안전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0월 0일 0시부터 연마실 근무를 명함."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서 이동을 시키려면 처음부터 시켰어야지,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연마실로 가라는 것인지. 그것도 나의 전공도 아닌, 연마실로의 이동이라니. 그래, 연마실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여러 가지 금속 제품을 연마기에 닦아 광을 내는 부서가 아닌가.
공장 내에서도 작업환경이 가장 열악하다고 소문이 난, 바로 그 부서가 연마실이 아닌가. 늘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해야 하는 부서.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콧구멍과 입 주변에 시커먼 자국이 생기는 그 부서. 그래서 마스크조차도 하루에 서너 번씩 갈아 끼어야 하는 그 부서.
"자네가 평소 일을 잘해서, 생산부장이 특별히 조치를 한 거라네. 그리고 연마실이 여기 프레스실보다는 백 배는 낫지. 먼지가 좀 많아서 그렇기는 하지만."
하긴, 프레스실 주임의 말이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연마실에서는 최소한 손가락이 잘리는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또한 내게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던 생산부장의 말마따나 잘 따져보면 나의 전공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광택을 내는 그 파란 재료가 화학재료였으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해서 그 무시무시했던 프레스실 근무를 입사 1년 만에 끝을 냈다. 그래. 나의 프레스실 근무는 참으로 아찔하고도 현기증 나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처음 공장에 발을 디뎠던 내게 프레스실은 현장 노동이 어떤 것이란 것을 제대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생산현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연마실은 또 얼마나 환경이 열악한 부서인가. 산 너머 산이었다. 근데 생산부장은 그 많은 부서를 제쳐두고 왜 하필이면 이 공장 내에서도 가장 열악한 부서로 낙인 찍힌 연마실로 가라고 했을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안전사고는 프레스실보다는 비교적 적은 편이므로 나는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이 사실은 뒤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생산부장이 나를 연마실로 이동시킨 것은 일종의 경고조치였다. 내가 여러 가지 문학회 행사 때문에 야근이나 철야에 자주 빠진다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였다고 했다. 또한 그 당시에 프레스실보다 연마실 일이 더 많았던 것이 이차적인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나와 주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실제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내가 각 회사의 사내 문학서클을 합쳐 큰 문학단체를 만든다는 것이 생산부장의 눈에 더 거슬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소위 내가 만나고 다니는 시인, 작가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상이 불건전하여 나를 그대로 가만 두면 공장에 몹시 어려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떡잎을 보면 알아요.
떡잎이 다른 싹은
뿌리가 깊어지기 전에
가지가 뻗기 전에
아예 싹뚝 잘라야만 해요
그래야 고분고분한 떡잎들
원하는 대로 잘 자랄 수가 있지요
그래야 배불뚝이 공장장님
잡초 같은 떡잎들 깔아 뭉개고
부처님 같은 미소 띨 수가 있지요
-이소리 <싹을 자른다>
그랬다. 연마실은 공기가 문제였다. 오죽하면 총무과에서 연마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회식을 하라며 고기값을 실비로 지급했을까. 하지만 연마실 노동자들은 회식을 할 때에도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았다. 주말마다 나오는 그 돈을 마치 보너스인양 한 푼이라도 더 절약하여 살림에 보태려고 했다.
"자, 한 잔 쭈욱 들자. 우리처럼 먼지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쐬주하고 고기로 묵어야 몸 속에 쌓인 먼지가 깨끗하게 씻겨내려간다 아이가."
당시 연마실 노동자들은 스스로도 걱정이 되는지 일주일에 한번은 어김없이 소주와 고기를 먹었다. 또 매일 같이 일이 끝나면 공장 옆 포장마차나 슈퍼마켙에 잠깐 들러 깡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셔야 오늘 하룻동안 몸 속에 쌓인 먼지가 깨끗하게 제거된다면서.
"이거는 술이 아이라 보약이다, 보약."
나 또한 그러한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공장 밖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몹시 좋아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날이 갈수록 주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니, 마시지 않으면 이상하게 뭔가가 허전했다.
그렇게 나는 빠우쟁이 근무에도 어느 정도 숙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빠우쟁이? 그래. 그 당시 공장사람들은 연마실에 근무하는 우리를 보고 빠우쟁이 또는 광빠우, 라고 불렀다.
그렇게 연마실에서의 봄과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때쯤 나는 연마실의 여러 가지 공정들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그래.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연마실에서도 정말로 잘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당시 내가 시커먼 먼지구덩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내 곁에 늘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학이란 자양분은 내게 끝없는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이상한 버릇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연마실에서는 한 공정이 끝나면 반드시 '드리클린'이란 세척제로 제품을 씻었다. '드리클린'은 휘발성이 매우 강한데다 알코올 비슷한 독특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이 제품을 세척하다가 '드리클린'에 취해서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금방 부은 맑은 '드리클린'은 조금만 맡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금속 제품을 세척하는 그 '드리클린'에는 일종의 마약 성분 같은 것이 들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연마실에서의 나는 늘 취해 있었다. 그 취함은 마치 어제 마구 마신 술이 아침이 되어도 덜 깬, 그런 상태와 비슷했다. 어쩌면 나는 그 취한 기분 때문에 먼지 속에서도 끝없이 반복되는 광빠우 작업의 짜증을 소화해낼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아침부터 온몸이 나른하고 아팠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일들을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작업은 단계적인 공정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만약 내가 작업을 하지 않게 되면 다음 공정을 맡은 노동자가 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문득 '드리클린'이 떠올랐다. 나는 비교적 깨끗한 천 조각에 맑은 '드리클린'을 묻혀 작업 도중 간간히 그 냄새를 조금씩 맡으며 일했다. 그러자 피로는 곧 사라졌고 기분까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번은 그 냄새를 아주 세게 들이마셔 보았다. 그런데 그때 머리 양 끝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뭉개구름 같은 것들이 내 눈 앞에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내가 일어났을 때 나는 작업장 한구석에 쓰레기통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동료들은 내가 일을 하다가 갑자기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뒤로 넘어졌기에 천만다행이었지 만약 앞으로 넘어졌으면 큰 일 날 뻔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앞에는 빠우기가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연마실로 옮긴지 불과 8개월 남짓만에 또 한번의 부서이동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도 연마실 공정을 모두 익히고, 부서장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연마기 조작까지 할 수 있었던 그런 때였다. 그리고 그때가 하필이면 10·26사건이 마악 터진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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