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끝없는 추억을 먹으며 살아간다이종찬
"축하해."
"네에에? 아니, 뜬금없이 무얼 축하한다는 겁니까?"
"니 연재기사가 마침내 100회를 돌파했더구먼."
"아항, 그거요."
그랬다. 지난 해 6월 25일부터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연재를 시작한 <내 추억 속의 그 이름>이 지난 5일자, "그 회사는 여름휴가도 없어"로 꼭 100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옆에 '100'이란 숫자를 쓰면서도 정말 무심결에 넘겼다.
그래. 일주일에 두 번 쓰는 연재기사가 '100회'째라면 정말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날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적어도 내 자신이 '100'이란 숫자 앞에서 그렇게 무덤덤하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그리고 조금 색다른 글을 쓸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하긴 매주 월요일은 내가 12시가 되어야 사무실에 도착하는 날이기도 했다. 또한 지난 주 월요일은 이상하게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많이 왔었다. 게다가 그 다음 날(화요일), 우리 가족이 경주 근처로 피서를 온다고 하는 바람에, 급히 민박집을 구하러 감포에 있는 전촌해수욕장까지 나가야 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100'이란 숫자가 달린 그 연재기사조차도 월요일에 내보내지 못하고, 월요일 밤에 급히 화요일에 보낼 기사까지 한꺼번에 썼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보냈다. 맞아. 그날은 '100'이란 숫자보다 '반드시 하루에 한 꼭지의 기사를 쓴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에도 너무나 바빴던 것이었다.
그래.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0'이란 숫자가 내게 주는 감회는 정말 남다르기만 하다. 그동안 <내 추억 속의 그 이름>에 '100'이란 숫자가 달리기까지에는 무려 1년하고도 1개월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정말 끈질기고도 줄기차게도 썼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아쉬움도 많다.
어떤 때는 많은 이야기를 꼼꼼하게 하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대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글을 쓰는 도중 나를 찾는 급한 전화가 오거나, 아예 정전이 되는 바람에, 잔잔하게 물결치던 내 추억의 필름이 그대로 끊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지난 해 10월 중순에는 연재 도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한동안 깊은 슬픔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또한 그때 많은 분들이 멀리 창원까지 조문을 오기도 했고, 조전 및 격려전화를 주기도 했다.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야, 니 공장일기 그거 솔직해서 좋더라. 기왕 쓰는 김에 그 당시 노동자들이 처했던 비참한 환경과 열악한 임금에 대해서도 낱낱이 한번 까발려 봐라."
"그렇찮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래. 나는 그동안 <내 추억 속의 그 이름>의 연재기사 대부분에 내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 내가 어릴 때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 그러니까 창원공단 조성으로 인해 잃어버린 내 고향의 그 아름다운 추억들을. 그리고 가끔 현재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는 내 가족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했다.
이제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0회를 넘기면서, 기왕 손을 댄 '공장일기'(매주 목요일 연재)에는 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실감나는 노동자들의 삶을 담아낼 작정이다. 또한 월요일에는 주로 초등학교 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틈틈히 쓰면서도, 창원공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여러 가지 추억들을 담아낼 계획이다.
게다가 틈틈히 현재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그러니까 <내 추억 속의 그 이름>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들 것이란 그 말이다.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0회를 맞아 그동안 제 글을 사랑해주신 수많은 독자 분과 저를 알게 모르게 아껴주신 분들, 그리고 <오마이뉴스> 편집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 올리며, 더욱 알찬 글로 보답할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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