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째라 카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2> 공장일기(5)

등록 2003.08.14 13:54수정 2003.08.1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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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계를 팔러 다니다가 지친 우리들은 장복산 근처에 가서 댓병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시계를 팔러 다니다가 지친 우리들은 장복산 근처에 가서 댓병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 이종찬

"야, 인자 클(큰일) 났다."
"와? 또 시계 팔로(팔러) 나가라 카더나?"
"그기 아이고, 가발로 맨드는 YH라 카는 회사에서 폐업을 하고, 나이 어린 가시나들을 몽땅 거리로 쫓아내뿟다 카더라."
"뭐어? 뭐라카노?"


"쉬이~ 그래가꼬 나이가 쪼맨(어린) 공순이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가꼬 데모로 하고, 경찰캉 싸우고 난리가 났는데, 공순이 하나가 죽었다 카더라. 걔 이름이 김경숙이라 카던가?"
"뭐어? 이거 이라다가 우리도 그 꼴 당하는 거 아이가. 이 일로 우짜지?"
"하다가 하다가 안되모 우리도 그 가시나들 맨치로(처럼) 한 판 붙는 기지 뭐. 별 기 있나. 목구녕이 포도청이라 안 카더나."

내가 프레스실에서 연마실로 마악 부서이동을 당했을 그 당시, 그러니까 1979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심각한 불황과 더불어 인플레가 만연해졌다. 또 그와 더불어 방위산업이라 일컫는 창원공단 내 대부분의 공장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일거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다니는 공장에서도 야근이나 철야를 하는 부서가 거의 없었다. 아니, 이제는 낮에도 일거리가 떨어져 노는 부서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 부서에 속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공장 운동장에 난 잡풀을 뽑거나, 부서별로 팻말을 꽂아 배추와 풋고추, 상치 등을 비롯한 농작물을 심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때부터 공장 곳곳에서는 무와 배추, 상치 등이 시퍼렇게 가득 차기 시작했다. 언뜻 밖에서 내가 다니는 공장을 쳐다보면 흡사 농부들이 공동으로 농사를 짓는 집단농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공장에서는 현장노동자들에게 계열사에서 생산한 물품 판매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시계로 한 개 들고 나가모 오늘 하루는 공장에 안 들어와도 정상근무한 걸로 친다 카더라."
"근데 시계로 들고 나가가꼬 못 팔모 우짜노?"
"그 거는 당연히 니가 책임져야지."


그와 더불어 매월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이 하루 이틀씩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주일, 보름 정도 밀리던 월급이, 몇 개월이 지나가자 아예 3~4개월씩 밀리는 것이 예사였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현장노동자들은 밀린 월급을 조금씩 가불을 해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쓰다 보니, 월급날이 되어도 대부분 빈 봉투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회사 물품을 들고 나갔다가 팔지 못한 노동자들은 밀린 월급마저 물품값으로 미리 대처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동안 노동자들이 조금씩 붓던 적금이나 계도 깨질 수밖에 없었고, 방세마저 밀려 아예 월셋방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들도 더러 있었다.


"씨팔 넘들! 아, 시계로 못 팔았다꼬 월급에서 제하모 우짜노. 우리가 오데 이 회사 판매사원이가?"
"그래도 우리 공장은 좀 나은 편이다. 다른 공장에서는 냉장고나 선풍기로 한 사람 당 몇 대씩 억지로 맡긴다 카더라."
"그라모 월급은?"
"그거 팔아가꼬 월급 대신 쓴다 카더라."

그랬다. 그동안 잘 나가던 창원공단이 힘겨운 공단 보릿고개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일부 노동자들은 달러빚을 내어 공장 주변에 조그만 생맥주집을 내기도 하고, 포장마차를 끌기도 했다.

그때 나도 우리 공장 근처에 있는 외동 마을에 '그리메'라는 주막식 카페를 냈다. 왜 주막식 카페였냐 하면 막걸리와 소주를 팔면서도 칵테일을 파는, 내 나름대로는 아이디어를 짜낸 그런 주막집이었다. 하지만 그 주막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장사도 장사였지만 무엇보다도 외상값 때문에 가게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뻔히 아는 처지에 외상을 주지 않을 수도 없었고, 외상값이 몇 개월째 밀려도 독촉할 수도 없었다. 또한 내가 가게를 열었던 외동은 곧 밀려날 곳이어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결국 단속에 걸려 무허가 영업으로 벌금을 물고, 외상값과 빚만 잔뜩 짊어진 채 가게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달러빚을 얻어 조그만 가게를 열었거나, 포장마차를 끌었던 노동자들 대부분은 단속에 걸려 하루 아침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일일찻집이나 일일주막을 열어 빚을 갚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빚은 더욱 늘어나기만 했다.

"씨팔! 이래 가꼬는 도저히 못 살것다. 무슨 방법을 찾던지 해야지…."
"그라모 우짤끼고? 불황이 끝날 때까지 배 째라 카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그라고 두 눈 딱 감아뿌라."

"그기 아이다. 우리가 맨 처음 누구 땜에 이리 됐노? 이기 모두 다 절마들(공장주와 간부) 땜에 그리 된 기 아이가."
"하긴, 지금이라도 밀린 월급을 한꺼번에 다 주고, 매달 월급을 꼬박꼬박 주모 그까짓 빚쯤이야 아무 것도 아인데, 그쟈?"
"내 말이 그 말 아이가."

그때부터 창원공단 근처에서도 비밀리에 야학이란 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창원공단 내 노동자들 대부분은 밀린 월급과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부서별 혹은 학교 동문별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창원공단 내에서 처음으로 현장노동자들의 집단 노동쟁의가 일어날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창원공단 내에서 노조가 있는 회사는 없었다. 또한 창원공단 내 입주한 기업체는 대부분 방위산업체여서, 젊고 용기 있는 현장노동자들 대부분은 병역특례라는 올가미에 묶여 있었다. 특히 병역특례를 받는 기간에 퇴직을 하거나, 자칫하여 회사에서 강제퇴직을 당하게 되면 1주일 이내 입대를 해야만 했다.

"니는?"
"나는 삼대째 내려오는 외동 아들 아이가. 그라고 요새 우리 옴마(어머니)가 아파서 시름시름한다카이."
"절마 저거 혹시 총무과 스파이 아이가?"

그랬다. 회사에서도 노동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음씨가 여린 현장노동자들에게 은밀히 뒷돈을 주고, 그러한 움직임을 낱낱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하다 보니, 현장노동자들끼리의 술렁임은 서로 이견만 엇갈리다가 그대로 가라앉고 말았다.

하지만 공장 밖 공기는 심상치 않았다. 곳곳에서 학생들의 데모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거리는 최루탄 내음으로 가득했다. 특히 수출지유지역과 한일합섬이 있는 마산에서는 일부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하나둘 합세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 시위가 바로 부마항쟁의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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