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춰진다, 고로 존재한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의 <거울의 역사>

등록 2003.08.19 11:11수정 2003.08.1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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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쳐다본다. 거울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면도하고 화장하는 우리 삶의 내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인 삶의 공간인 거리와 일터에도 구석구석 놓여 있기 때문에 쳐다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특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과 차량들의 물결을 파노라마처럼 담아내고 있는 도시의 화려한 쇼윈도와 빌딩의 미끈한 유리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어서, 거울은 도시적 삶의 한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영국의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가 “거울 없이 삶을 본다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마음 속에 그렸던 풍경은 바로 거울로 가득 찬 이러한 도시적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프랑스의 젊은 인문학자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을 “거울 없이 자기 자신을 본다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로 고쳐 말한다.

‘거울’이라는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오브제에 비친 인간의 정신사를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추적하고 있는 그녀의 야심 찬 저작 <거울의 역사>는 바로 그 말에 대한 길고 긴 논증이다.

그녀는 자신의 논증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우선 역사적 사실들에 주목한다.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초기의 금속거울에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유리거울의 등장, 그리고 베네치아의 무라노와 프랑스의 생고뱅에서 이루어진 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매우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던 유리거울이 차츰 일반 서민가정으로까지 보급되고 확산되는 과정, 즉 말 그대로 거울의 역사를 1부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녀가 프랑스의 오래된 문헌과 고문서들을 뒤적거려 전해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지금은 너무나도 흔하고 일상적인 물건이 되어버린 유리거울은 불과 3~4세기 전만해도 부유한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들의 재산목록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매우 귀중한 재산이었고 라파엘의 그림보다도 훨씬 값나가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스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기능으로서의 거울은 금속거울이나 유리거울의 등장 이전부터 인류를 사로잡은 매력적인 대상이었으며, 그래서 많은 고대 철학자들은 거울과 그 거울에 비친 반사상을 자신들의 철학적 성찰의 주요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예컨대, 거울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인식의 가장 하등 단계로 분류한 플라톤은 거울의 반사상을 감각적 실재를 갖지 못하는 신기루라고 여겼으며, 인간의 시각이 물체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인들이 월경 때 거울을 바라보면 거울이 더럽혀진다고 말했다.

또한 ‘너 자신을 알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거울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도록 해주며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자만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주는 계몽의 도구로 생각했다.


고대에 형성된 거울을 바라보는 이러한 두 가지 시선―즉, 거울은 거짓되고 헛된 모습을 보여주는 거짓말쟁이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훌륭한 조언자이다―은 이후 거울의 운명이 되었다.

거울이 운명적으로 지니게 된 이러한 이중성은 또한 거울의 물리적 특성―즉,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실제의 내 모습과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오른쪽과 왼쪽이 서로 뒤바뀌어 있어서 닮았으면서도 다르며 동일자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상이다―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거울의 이중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시대는 중세였다. 중세에는 거울은 신의 반사상이거나 아니면 악마의 도구로 간주되었다. 육체를 비춤으로써 현세의 쾌락을 향한 욕망이 깃들게 하는 유혹의 장소인 거울에는 마녀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거울의 잠재적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제들은 거울에 비친 육체 너머의 영적인 정체성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영성의 거울은 바로 성서였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이르러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발견하게 됨에 따라 중세 신비주의에서 지켜 온 거울의 주제는 굴절되어 이제 인간의 눈과 두뇌를 관통하게 되었다. 신의 영성을 인간의 감각과 지성으로 대체한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으로 하여금 거울 속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인간은 신의 자화상이다”라는 자신만만한 선언을 하게 하였다. 자신의 모습을 정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린 뒤러의 자화상은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다.

17세기에 이루어진 광학 혁명과 유리거울의 보급은 이러한 전환을 가속화시켜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급속하게 변모하게 되었다. 세계 속에서 두 물체 사이의 관계로 인식되었던 거울의 반사상이 지니고 있던 비밀은 이제 그 신비를 잃게 되었다.

광학자이기도 하였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가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듯이, 닮음은 이제 더 이상 두 물체의 관계 안에 있지 않고 관계를 해독해서 언술하는 인간의 정신 안에 깃들어 있다고 천명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이러한 이성의 승리는 인간의 이성처럼 명료하고 빛나는 유리거울이 일반 서민가정으로까지 확산, 보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전과(戰果)였다.

거울의 세속화는 자신의 모습을 갈고 닦는 ‘교양인’의 등장을 부추겼고 거울은 거기에 합당한 품위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서의 두 가지 시선, 즉 내면화와 모방이라는 이중의 시선을 제공하였다. ‘너 자신을 알라’의 거울 안에서 자기 자신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덕을 함양하고 또한 타인이라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상을 세움으로써 외부의 시선 하에 드러난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거울의 주요 기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에 끼여든 타인의 시선은 백설공주의 계모가 “거울아, 나의 욕망의 거울아, 내가 여전히 아름다우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시샘과 욕망의 거울이 되게 하였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 속에서 그 거울은 깨졌고 깨진 거울조각 속에서 우리는 조각난 우리의 분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얼굴 중에서 자기 자신의 얼굴은 바로 우리가 가장 아는 것이 없는 얼굴인 것처럼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분신들은 낯설고 공포스러웠다. 그 거울 너머에는 광기와 죽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울로 가득 찬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분신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넘쳐나는 이미지와 수 많은 시선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가장 내밀한 깊이까지 추적당하는 거울 속의 반사상이 되었으며, 그 반사상조차도 기계에 의해서 끝없이 복제당함으로써 진위의 구분이 불가능한 ‘주체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가 <거울의 역사>의 결론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복제 금지>를 언급하는 것은 바로 ‘주체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그 그림에서 읽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현대사회의 수 많은 시선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을 주장하고 있는 그 그림에는 한 남자가 많은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거울 앞에 서 있는데 거울에는 그의 얼굴이 아니라 등이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비밀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접어놓은 페이지들

자신의 반사상을 사심 없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자 시몬 베이유는 “아름다운 여인은 거울을 보고는 자신이 바로 그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못생긴 여인은 그게 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라고 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상은 해부학적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도 아니며, 사회적 존재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 투사(投射)이며, 순간의 칼날이 고정시키는 정교한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상이 언제나 변화하는 나의 자아와 일치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상은 무겁고 부동이며 고집스럽다(이것은 우리 사회가 상에 의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가볍고 분열되고 흩어져 있다. 사회에 의해 동일시의 힘을 부여받는 이 반사상은 결국 피 흘리는 상처에 지나지 않으며, 말하자면 자아의 천박한 포장, 의식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속박일 뿐이다. 나에 대해 외면화된 상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두렵다.” (289쪽에서)
이렇듯 고대 신화 속의 나르시스의 물거울에서부터 현대사회의 무한복제의 거울 조각에 이르기까지 거울 속에 비친 인간의 정신사를 흥미롭게 펼치고 있는 사빈 멜쉬오르 보네의 <거울의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울과도 같아서 자못 눈부시기까지 하다.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놀라운 솜씨와 훌륭한 필치로 과학과 예술, 문학과 철학, 역사와 성찰을 넘나들고 있다”고 이 책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장 들뤼모의 추천사처럼, 그 눈부심 너머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광원(光源)은 바로 그녀의 풍부한 지식과 시적인 통찰력이다.

<거울의 역사>는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 사실은 그 이전에 인간은 호모 스페쿨룸(‘speculum’은 라틴어로 ‘거울’이라는 뜻으로 speculation(사색)의 어원이기도 하다)이었기 때문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우리는 거울 앞에서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비춰진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거울의 역사 - 누벨 끌리오 총서 02

사빈 멜쉬오르 보네 지음, 윤진 옮김,
에코리브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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