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군이요!" 그 목소리 다시 듣고 싶습니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장기와 장인어른 생각

등록 2003.08.23 06:48수정 2003.08.2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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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장모님 칠순 때. 장인 장모님 모습. 왼쪽에 박종철군 아버지 모습도 보인다.

장모님 칠순 때. 장인 장모님 모습. 왼쪽에 박종철군 아버지 모습도 보인다. ⓒ 느릿느릿 박철

잘은 하지 못하지만 내가 조금 할 줄 아는 게 장기입니다. 어려서 동네 아저씨들이 장기 두시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조금 배웠습니다. 바둑도 마찬가지인데, 실력이 신통치 않습니다. 장기도 그렇고, 바둑도 그렇고, 몇 번 배워보려고 장기판도 되고, 뒤집으면 바둑판도 되는 겸용 판을 사다 몇 번 두어보다 말았습니다. 무더운 여름도 지나가고 조석(朝夕)으로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올 가을에는 다시 장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집 아딧줄하고 한판 두려고 합니다. 이 녀석이 어디서 배웠는지 조금 할 줄 안다고 합니다. 장기가 재미있는 것은 장기 알마다 다 이름이 있고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고 싶다고 아무렇게나 가는 것이 아니라, 장기 알마다 자기가 걸어가야 할 걸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대세가 결정될 때쯤, 상대진영을 꼼짝 못하도록 만든 다음, “장군이요!”합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도 하나도 꿀릴 것 없다는 듯이 “멍군이요!”합니다. 서로 “장군, 멍군”합니다. 그게 재밌습니다.

장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장기를 둡니다. 얼마만큼 두고 나면 싫증도 날 텐데, 장기판을 떠나질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장인 장모님이셨습니다. 두 분 다 연세가 70을 넘으셔서 특별한 소일거리도 없으니, 심심풀이로 장기를 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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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들을 대신해서 '5.18광주 시민상'을 받으시는 모습.

아들을 대신해서 '5.18광주 시민상'을 받으시는 모습. ⓒ 느릿느릿 박철

어쩌다 우리 내외가 서울 처가댁을 방문하면 아파트 현관까지 장기를 내리치는 소리가 ‘딱딱’ 하고 들립니다. 내가 두 분이 어떻게 하고 계신가?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갑니다. 장인어른은 사위가 온 줄도 모르고 장모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십니다. 소리를 지르시는 대부분 이유는 ‘한 수만 물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장모님은 ‘아니 사내대장부가 무슨 장기를 두면서 한 수 물러달라고 하느냐?’면서 물러주질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장인 입에서 늘 나오는 말씀은 ‘야, 치사하다’였습니다. 장기 실력은 두 분 다 비슷비슷한데 우리 장모님은 총기가 좋으셔서 실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 장인어른은 성격이 급하셔서 서두르다가 꼭 코너에 몰려 장모님이 ‘장군이요!’하고 나오시는데, ‘멍군이요!’하고 대응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늘 소리를 지르시는 분은 장인어른이셨습니다. 나는 두 분이 서로 알콩달콩 하시면서 장기를 두는 모습이 그렇게 정겹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이제 늙으면 아내와 장기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장인어른은 경북 영주 분으로서 한학자의 집안이십니다. 장인어른이 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고 경찰공무원 생활을 이십여 년을 하셨습니다. 나이 47세에 박봉의 경찰 공무원 생활을 접으시고 식솔(食率)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퇴직금을 남의 말만 믿고 빌려주었다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 떼이고 말았습니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장인어른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a 장인어른이 써 주신 천자문. 나는 장인어른에게 서예를 배웠다.

장인어른이 써 주신 천자문. 나는 장인어른에게 서예를 배웠다. ⓒ 느릿느릿 박철

봉건사상이 몸에 철저하게 배어있는 분이어서 막노동도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장삿일은 꿈도 못 꾸는 일이어서, 하는 수 없이 하릴없이 집안에 들어 앉으셨고 유일하게 아파트 노인정에 나가서 동네아이들 한문을 가르치시는 일을 10년 넘게 하셨습니다.

1980년 5월, 막내아들(김의기. 서강대 4년)이 인사도 없이 이 민족의 민주제단에 하얀 꽃가루가 되어 부모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그 슬픔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꼭 맞습니다. 20년 넘게 한을 삭이며 자신의 무능을 탓하시며 사셨습니다. 답답한 속내를 이따금 쓴 소주로 달래시며 그렇게 노년을 지내셨습니다.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셨지만 속정이 깊으신 어른이셨습니다. 장모님을 무척 의지하고 사셨습니다. 장인어른의 유일한 삶의 안식처는 장모님이셨습니다. 당신의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분이셨고, 당신의 급한 성격을 토닥토닥 달래주시는 분도 장모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사시다 70넘어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거의 4년 동안을 문밖출입을 못하시고 집안에서만 간신히 화장실 출입을 하실 정도로 지내시다, 3년 전 가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끔 아내와 서울 잠실 처가댁을 갑니다. 아파트 현관 앞에 서면 지금도 ‘딱딱’하는 장기 알 두는 소리와, 한 수만 물려달라고 떼를 쓰시며, ‘야, 정말 치사하다’는 소리도 들리는 듯 합니다.

어사지간 장인어른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떠나가신지 3년 세월이 지났고, 이제 기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큰 사위는 든든해서 좋다고 하셨는데, 막내사위인 저에 대해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장인어른, 많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며

▲ 199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기념식

아버지가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몇 번 그런 일이 있었기에 괜찮으시겠지 생각했다. 몇 년 째 중풍으로 누우셔서 대소변 받아내신지 2년 동안 심해지셨다 괜찮아지셨다 했기에….

우리교회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어서, 이 행사 끝나고 간다고 엄마에게 말씀드렸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행사 끝나고 오후에 남편과 애들과 같이 서울친정엘 갔다. 엄마가 말씀하신다. 몇 번 고비가 있었노라고. 형부가 막내딸 보기 전에는 안 돌아가실 거라고 말했다는 말씀도 하신다. 아버지는 우리를 알아보시고 웃어주시고 아는 척도 해 주신다.

다음날 아침, 남편과 애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남아 있기로 했다. 아버지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드렸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어려웠다. 어쩌다 길에서 만나면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아버지와 웃으면 얘기하는 모습이 많이 부러웠다.

노래를 잘 하시고, 장구도 잘 치시고, 큰 소리도 잘 치시던 아버지, 아버지가 늙고 병드셔서 이렇게 누워 계시는구나 생각하니 너무나 가엾고 마음이 아팠다. 손톱 발톱을 깍아 드리고, 수건을 물에 적셔서 몸을 닦아 드렸다.

“아버지 찬송 불러드려요?”
“응” 하신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좋으세요?” 했더니 웃으시며
“응” 하신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리를 주무르며 계속 불렀다.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남편얘기, 애들 얘기, 교회 얘기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해 드렸다. 가끔
“아버지 듣고 계세요?” 하고 물으면
“응” 하신다.

점심을 조금 드시곤 한숨 주무시는 것 같다. 아버지 곁을 지키며 상태를 보는데 6시가 가까워지니까 조금 달라 보이신다. 임종이 가까운 듯 하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여러 번의 임종을 지켜본 경험이 있기에 조금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게 이제 곧 가실 것 갔다고 사람들을 다 부르라고 했다. 엄마도 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들, 딸 동생들에게 연락을 했다. 다들 와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눈도 뜨시고 고개도 끄덕이신다. 얼마 후 아버지의 발이 하얗게 되신다. 다리까지.

“아버지, 편안히 가세요. 하늘나라에서 만나요. 아버지 정말 고마웠어요.”
인사를 했다. 온 식구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찬송가를 불러드리는 중에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언니가 말했다.
“거 봐. 아버지가 주숙이 보면 돌아가실 거라고 했잖아.”
‘그럴 줄 알았으면 더 늦게 올 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지금 편안하시죠. 저를 보시고 돌아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막내딸 김주숙(필자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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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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