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가 가을 인사를 합니다

<느릿느릿 이야기> 강화 교동의 가을풍경

등록 2003.08.28 18:32수정 2003.08.3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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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올해 장마가 길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장대 같은 비를 마구 쏟아 붓더니, 오늘 아침은 오랜만에 날씨가 말끔해졌습니다.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밖에 나가보니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고 시계(視界)가 좋아 바다 건너 북한 연백의 너른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올 들어 가장 좋은 날씨인 것 같습니다. 가을로 가는 길목입니다. ‘쓰르럭 쓰르럭’ 매미소리도 요란하고 잠자리들이 낮게 비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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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농촌의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풍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고추밭에 고추들이 빨갛습니다. 이른 벼들은 벌써 벼이삭이 실한 게 추석 때면 햅쌀을 먹을 만큼 제법 다 자란 티를 내고 있습니다. 더러 벼들이 지난 비바람에 쓰러진 곳도 있습니다. 다 자란 벼들이 한번 쓰러지면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물기가 있는 질척한 곳에 벼이삭이 누워있으면 소출이 형편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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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비바람이 지나가고 날씨가 밝게 개자 나무들도 산도 풀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립니다. 호박꽃도 오랜만에 햇빛구경을 하게 되었다고 활짝 웃고 있습니다. 신작로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남정네들은 논에 나가 논두렁이 터진 데가 없나 살펴야하고, 여러 가지 살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오리논들은 벼이삭이 패자 오리들을 논에서 빼서 지나갈 때마다 들리던 꽥꽥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합니다. 오리집에는 오리가 한 마리도 없이 쓸쓸합니다. 오리집에 오리가 들라면 또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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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집집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가 새색시 얼굴처럼 곱습니다. 물꽝에는 물이 넘치고 수로에도 물이 콸콸 흘러갑니다. 족대 들고 들어가 첨벙거리면 미꾸라지깨나 잡을 것 같습니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시는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고추 많이 달렸어요? 딸 게 많지요?”
“어휴. 이번 비로 고추가 많이 떨어졌시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많이 달린 것 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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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올해 고추 값이 좀 올랐대요?”
“몰라요, 물고추는 한 포대 8만원도 받았다고 하고, 9만원도 받았다고 하는 데 고춧가루는 아직 모르겠시다. 중국에서 수입을 하지 말아야 되는 데 중국에서 고춧가루 수입 해오면 또 똥값으로 떨어질 텐데 그게 걱정잇시다.”

“아저씨랑 같이 따시지 혼자 따세요?”
“어이구 바쁠 때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대룡리 볼 일 본다고 나갔시다. 일철에는 술 좀 먹지 말아야지, 대룡리에 나가기만 하면 술을 퍼 먹고 오는 통에 내가 못 살겠시다. 지금 일이 밀려서 큰일잇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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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가을은 가을인가 봅니다.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습니다. 빨간 다알리아도 자기가 예쁘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키가 높습니다. 밤골에는 밤들이 익어가고, 읍내리 과수원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과수원에 잠시 들렀습니다. 엊그제 만났던 과수원 아주머니를 또 만났습니다. 파란 햇사과가 씹으면 상큼하고 물도 많고 씹히는 맛도 좋습니다.

“올해 사과 작황이 어때요?”
“지금까지는 큰 바람이 없어서 좋은 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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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과수원아주머니가 밝은 모습으로 포즈를 취해 주셨습니다. 웃는 모습이 사과보다 더 예쁘십니다. 올해 상수리도 많이 열렸을까요? 그건 비밀입니다. 많이 열렸다고 하면 뭍에서 사람들이 상수리 따러 엄청나게 많이 들어와 나무를 작살내기 때문에 말 할 수 없습니다.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계절의 풍요로움만큼 농촌사람들도 땀 흘려 일한만큼 소득이 보장되어 저들의 삶도 가을풍경처럼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카메라로 풀 섶에 앉은 잠자리를 한 장 찍으려고 해도 다가서면 도망갑니다. 길가 강아지풀이 가을바람에 살랑 살랑거립니다. 지금 농촌의 가을풍경은 평화(平和)-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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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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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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