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바로 내가 교동을 빛낸 사람이야!”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9)

등록 2003.09.01 05:39수정 2003.09.0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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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우리집 홈페이지 이름이 ‘느릿느릿’이 아니면 누가 들어오겠어요?"


요즘 우리집 둘째 아들 넝쿨이가 매사에 침착하질 못하고 허둥대다 실수가 잦습니다. 건망증도 집안 내력인가요? 나를 닮아서 그런 것인지, 이제 중학교 1학년짜리가 수명이 다한 형광등처럼 껌뻑껌뻑합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교과서를 두고 가는 일은 보통이고 엄마 닥달에 밤을 새워 한 과제물을 두고 가기도 합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으면 서둘러서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급한 게 없습니다. 그렇게 꾸물거리다 버스를 놓친다고 해도 화장실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나올 줄 모릅니다.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큰아들 아딧줄은 벌써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다 마치고 버스를 타기위해 집을 나섰는데, 넝쿨이는 이제 옷을 입습니다. 그러니 아내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요.

아들이 둘인데 성격이나 행동하는 것이 정반대입니다. 다 지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것인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큰 녀석은 매사에 급하고, 성취욕이 강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똑 부러지게 합니다. 자기관리가 철저합니다. 작은 녀석은 매사에 느긋하고, 전혀 급한 게 없고 절대 남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격이 매우 온순하고 정이 많습니다. 엄마 일을 제일 많이 도와줍니다.

오늘도 넝쿨이가 늑장을 부리다가 차를 놓쳐 아내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내가 애들 나간 다음에 아내에게 “오늘은 넝쿨이가 뭐 빼놓고 간 것 없어요?” 하고 묻었습니다. 오늘 저녁,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내가 넝쿨이에게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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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넝쿨아, 너 요즘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너 그래 가지고 학교에서 반장노릇 잘 하는 거냐? 아빠가 조금 걱정이 된다. 느릿느릿 움직이면, 학교에 갖고 갈 것은 빠트리지는 말아야지, 한없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정말 괜찮은 거냐? 아니면 무슨 고민이 있어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냐? 속 시원히 말 좀 해봐라.”


넝쿨이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조금 심각한 표정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딧줄이 한마디를 거듭니다.
“아빠, 얘는 느릿느릿이 아니고, 느적느적이에요. 그게 몸에 배었어요.”
“야, 느릿느릿하고 느적느적하고 비슷한 말 아니냐?”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느적느적하니까 실수투성이지요.”
이번에는 은빈이가 큰 목소리로 끼여듭니다.

“아빠, 넝쿨이 오빠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우리집 홈페이지 이름이 ‘느릿느릿’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리 홈페이지에 들어오지 느릿느릿이 아니면 누가 들어오겠어요? 넝쿨이 오빠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조금 느려서 그런 것이니, 그건 나쁜 거 아니잖아요?”


할 말이 없습니다. 은빈이 그 말에 우리집 다섯 식구가 다 웃고 말았습니다. 내가 넝쿨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래, 넝쿨아! 은빈이 말이 맞다. 아빠가 잘못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성격이 그런 것을. 다 아빠 기준으로 생각하고 한 말이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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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오빠, 내 이야기를 써. 내가 바로 내가 교동을 빛낸 사람이야!"

요즘 넝쿨이와 아딧줄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방학숙제 중에 ‘교동을 빛낸 사람’과 ‘교동의 문화 유적지’를 각 조별로 연구해서 제출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방학동안 방학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아 이제 방학숙제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교동의 문화유적’은 사진을 찍어 앨범에 스크랩을 하고 설명을 곁들여서 제출하면 됩니다. 같은 조 다른 애들이 사진기가 없다고 해서 두 녀석이 자기 조를 대표로 해서 숙제를 했습니다. 사진을 찍느라 며칠동안 애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제법 사진도 잘 찍었습니다.

또 한 가지 ‘교동을 빛낸 사람’을 연구해서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송암 박두성 선생’(우리나라에서 훈맹정음을 고안해 내신 분이 교동출신이다) 한 분만 집중해서 내다보니 아이들 숙제가 겹치기고, 또 짜깁기가 되고 말았나 봅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 송암 선생님 말고 ‘교동을 빛낸’ 다른 사람 이야기를 다시 써보라고 하시면서, 넝쿨이 선생님도 아딧줄 선생님도 ‘너희 아빠이야기’를 한번 써보라고 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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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학교선생님들이 내가 인터넷신문에 글을 쓰는 것을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인터넷신문에 글을 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메일과 전화를 받습니다. 팬이라며 이따금 선물을 보내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특히 교동출신으로 타지에 나가 사시는 분들에게 “우리 교동을 잘 소개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서 학교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작은 보람이라고 할까요? 넝쿨이와 아딧줄이 ‘그럼 아빠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쓰지?’하고 걱정을 하니까, 아내가 나서서 “아빠 글이 실린 신문이나 잡지가 있잖아. 그리고 아빠 팬들이 보낸 메일이나 편지도 많이 있고, 또 인터넷신문에 저장되어 있는 아빠 사진과 글이 얼마나 많이 있니? 그걸 너희들이 정리해서 쓰면 되잖아?”하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잠자코 동화책을 읽고 있던 은빈이가 불쑥 대화에 끼여듭니다.
“오빠! 그러지 말고 내 얘기를 써. 아빠가 내 이야기(우리집 늦둥이의 사랑이야기)를 인터넷신문에 써서 얼마나 유명해 졌는지 알아? 내가 바로 교동을 빛낸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빠 이야기 쓸 것 없이 내 이야기를 써도 되잖아.”

온 집안 식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은빈이는 정말 자기가 교동을 빛낸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집 늦둥이로 태어난 은빈이가 교동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유감이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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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그러나 넝쿨이와 아딧줄 선생님이 진짜 아셔야 할 것은, 바로 교동에 사는 모든 아이들의 부모님이 교동을 빛낸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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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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