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 짓고 살만 하니 돌아가시네"

마을 회관 스피커에서 이장님의 다급한 목소리 들려 왔습니다

등록 2003.09.02 15:10수정 2003.09.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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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그제도 찔끔찔끔 왔고 오늘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종지에서 웬만큼 자란 배추 모종을 밭에 옮겨심기로 작정하고 있었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사랑채 앞뒤 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며 손을 놓고 있었는데 마을 회관 스피커에서 이장님의 다급한 목소리 들려 왔습니다.

“봉명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유00 어머니께서 조금 전 11시 35분에 별세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유00 어머니께서 조금 전 자택에서 별세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48분이었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유00라는 분이 귀에 익어 우산을 받쳐들고 '밑에 집 유씨 할아버지네' 집에 내려가 여쭤 보았습니다.

“유 머라구 하는데 잘 안들려서, 어떤 분이 돌아 가셨데유…”

“민우(유씨 할아버지네는 늘 우리집 큰 아이 인효를 민우라고 부르십니다) 아부지는 잘 모를거여, 윗동네 살았던 사람인디.”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데유?”

“고건 잘 모르건는디, 그 양반 얼메 전까지만 혀두 멀쩡허게 동네에서 왔다갔다 혔는디, 살만 허니께 그렇게 가시네, 집두 새루 잘 지어 놓구서 말여….”

‘살만 하니 돌아가신다.’ 시골에서는 고생 고생하다가 새집을 반듯하게 잘 지어 놓고 이제 겨우 살만하니까 돌아가신다는 노인 분들이 꽤 많습니다. 요 몇 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도 대부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요 몇 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 중에 새집 지어 사시던 분들이 많지유?”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양옥집으로 번듯하게 지어놓구서 말여.”

“…그리구 일손 놓으신 분들이 많지유?”

“그렇치, 일에서 벗어나 겨우 살만했는디 저 세상 간 사람이 많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 잘 지어 놓고 평생의 일손을 놓게 되면 그만큼 환경의 변화, 기운의 변화에 눌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나 노쇠한 몸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하게 됩니다. 흙으로 진 토담집 기운에 평생 의지해 살던 몸이 시멘트 양옥집에 살다보면 그 기운에 눌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통적인 토담집은 마루청이나 마당으로 혹은 부엌을 오고가며 트인 생활을 하는 구조인데 반해 너른 거실을 갖추고 있는 양옥집은 대부분 건물 안에서 이뤄지도록 짜여져 있어 갇혀 생활하는 편입니다. 일이 없다보니 하루 종일 안락한 방안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나오는 유선방송에 눈을 붙입니다. 그것은 결코 노인들에게 편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장은 편할지는 몰라도 노인들에게는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입니다. 냉방장치를 달아 무더운 여름을 막아주지만 평생 몸에 베어 있던 자연의 바람을 차단시킵니다. 한 겨울 보일러를 팡팡 돌려 찬바람을 막아 줄 수는 있지만 신선한 공기를 빼앗기게 됩니다.

평생을 토담집에 살았던 노인들의 몸에 배어 있는 기운은 자연에 가깝다고 봅니다. 자연의 기운을 마시고 몸에 담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런 기운을 차단시키고 억지 기운을 채우게 된다면 굳이 의학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분명 좋지 않은 영양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양옥집이라는 구조 자체가 당장 눈에 보이게 편할지는 모르지만 양옥집이라는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운을 소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흙과 시멘트의 기운과도 같습니다. 분명 흙은 시멘트에 비해 기운이 좋습니다. 흙은 우리 몸의 기운에 가깝지만 시멘트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골 노인들에게 허물어져 가는 토담집을 적당히 손 봐 주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번듯한 양옥집을 지어 주고 일손을 놓게 해주는 것은 진정한 효도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시골 노인들의 건강을 해치는 원인 중에 하나라 봅니다.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 그것도 자연의 기운을 차단시키는 변화는 노인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약한 노인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평생 살아왔던 토담집을 허물고 갑자기 양옥집으로 번듯하게 새로 지어 사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밑에 집 유씨 할아버지네 욕쟁이 할머니께서 걱정을 하십니다.

“헤헤, 니미랄, 우리 집두 월메 전에 고쳤잖여, 나두 인저 금방 뒈지는 거 아녀!”

“에이, 제 말씀은 그런 게 아녀유, 할머니네는 흙집 그대루 두고 부엌하구 마루께만 고쳤잖유, 괜찮아유, 제 말씀은 흙집을 몽창 허물어 버리고 양옥집으루다 고치는 걸 말씀 드린거지유. 그리구 사실 저두 정확히 잘 몰라유, 그 분이 뭐 땜에 돌아가신지도 잘 모르잖아유, 그냥 한번 생각해 보니께 그런 것 같아서 말씀 드린거유, 좌우지간에 흙보다는 세멘트가 안 좋잖아유….”

“민우 아부지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니미랄, 세멘 독 오른 사람은 봤어두 흙 독오른 사람은 못봤으니께….”

“할머니하구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정정하게 일을 하고 계시잖아유, 돌아가신 분은 집 짓구서 일손도 놓으셨다면서유….”

“그려, 고생 고생하다가 새집 지어놓고 편케 산다 싶으면 금방 죽어버리지, 나두 그려, 일 안하고 있으면 더 힘들어…. 땅 팔아 달라구 손 내미는 자식들도 문제지만, 돈 많이 번 자식 덕에 일손 놓았다가 되려 더 큰일 치르게 되는지두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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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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