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고추장에 ‘하늘을 담은’ 간장독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18]전라북도 순창의 고추장

등록 2003.09.02 18:40수정 2003.09.1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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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갛게 고추장이 익어가는 독
빨갛게 고추장이 익어가는 독오창석
조선후기에 와서야 우리네 밥상에 올랐지만 지금에 와서는 단 한 차례라도 그것이 빠진 끼니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추는 이 땅의 음식문화를 그야말로 단기간에 변화시켰다.

아들을 낳은 집에서는 부정한 것을 막고자 잘 익은 고추를 금줄에 꿰어 쳤고 한해 먹을 장을 담글 때도 역시 왼새끼에 숯과 함께 꼬아 넣어 장독에 둘렀다. 모두가 매운 맛을 통한 벽사(闢邪)를 기대한 순박한 신앙이었다.


가을 뙤약볕에 말리는 태양초
가을 뙤약볕에 말리는 태양초오창석
한여름 들일 갔다 돌아오신 어머니가 한 웅쿰 따 온 풋고추를 숟가락 채 푹 떠온 된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먹는 그 상큼하고 알싸한 맛은 볼품 사나운 시커먼 꽁보리밥을 천하에 없는 꿀맛으로 만들었다.

말린 고추, 젓갈, 마늘 따위를 확독에 대충 갈아 만든 양념으로 묻혀낸 열무김치나 배추 겉절이의 얼큰하고 시원한 맛 또한 비길 데 없는 별미였다. 추수가 시작되는 시기엔 따뜻하고도 날카로운 가을 햇볕 아래 마당과 길섶에는 고추 말리기가 한창이었다. 농사일을 거들 수 없어 집에 남은 할머니는 닭들이 먹이를 찾는답시고 멍석에 널어진 고추를 온통 헤집어 대고, 똥까지 싸대는 소갈머리 없는 행동을 제지하느라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17세기 이전에는 후추나 산초가 매운 맛을 내는 양념이었으나 워낙 비싸고 귀한 것이 되어 대중화되지 못하였고 고추가 들어와 일상화되면서 매운 맛을 내는 양념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나 ‘고초 당초 맵다지만 시집살이 더 맵더라’라는 경상도 지방의 민요에서처럼 고단한 삶이거나 매운 자극에 대한 비유는 고추의 차지가 된 것이다.

먹음직스러운 더덕장아찌
먹음직스러운 더덕장아찌오창석
화학적으로 따지자면 고추의 매운 맛을 내는 특성은 캡사이신(capsycine)이라고 하는 성분 때문이다. 이 성분이 음식 속에서 기름의 산패를 막고 젖산균의 발육을 도와 음식의 맛을 증진시키니 동식물성을 막론하고 발효식품이 중심인 우리의 음식문화와는 찰떡궁합일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순창의 백산리 참새뜰 2만 5천평에 고추장 제조농가 54가구가 1997년부터 들어서 있는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순창의 백산리 참새뜰 2만 5천평에 고추장 제조농가 54가구가 1997년부터 들어서 있는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오창석
고추의 쓰임은 크게 풋고추인 ‘채소’와 말린 고춧가루를 이용하는 ‘양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고추장은 양념이자 그 자체가 반찬으로 독립하기에 손색없는 식품이다.


전라북도 순창엘 가면 타지방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맛좋은 고추장을 찾아 볼 수 있다.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고을로 불렸듯 물이 좋고 지대가 높아 여름에도 날씨가 서늘하여, 질 좋은 고추와 고추장 생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고장이다.

고추의 전래시기가 임진왜란 이후이니 시대적으로 맞지는 않으나 전해오는 전설로, 고려말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찾아 순창에 왔다가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에 점심을 먹고는 그 후 그 고소 달콤한 맛을 못 잊어 진상케 했을 만큼 뛰어난 맛임을 자랑하는 애교스런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고추장 만들 때 쓰는 메주
고추장 만들 때 쓰는 메주오창석
굴비가 영광 법성포를 벗어나서 만들어지면 제 맛을 못 낸다고 하듯 ‘시집간 딸도 시가에서는 제 맛을 못 내는 것이 순창 고추장’이란 말을 들을 법 하다.

고추장의 맛은 첫째가 주재료인 메주에 의해서 좌우되는데, 멥쌀과 콩을 4:6의 비율로 섞어 손바닥만한 도넛 모양으로 반죽하여 볏짚으로 엮어 매달아 둔 다음 황색 곰팡이가 피면 잘게 부수어 5일 정도 건조시킨다. 여기에 찹쌀가루와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리고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보통 가을에 메주가루를 저장하였다가 10월부터 3월 사이에 담그는데 얼마 전만 해도 뱀날(巳日), 용날(辰日)에는 부정탄다 해서 담그는 일을 삼갔다고 한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명인전통고추장'의 박현순 씨가 장독을 살피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명인전통고추장'의 박현순 씨가 장독을 살피고 있다.오창석
시어머니에 이어 3대째 고추장을 만들고 있는 ‘명인전통고추장’의 박현순씨.

“요즘에도 옛맛을 못 잊어 보리고추장을 찾는 사람도 있는디요, 못 묵고 못살 때 얘기제. 옛날로 가면 수수고추장, 고구마고추장도 있어라, 그래도 찹쌀고추장이 최고요.”

요즘에는 매실고추장도 담그는데 맛이 찹쌀고추장 못지 않고 그 외에도 더덕장아찌, 굴비장아찌, 감장아찌 등도 최고의 맛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뼛골이 녹아 내리지만 제대로 맛 낼라고 모다 손으로 담그요. 거기다가 요샛 것 독아지 쓰면 숨을 못쉰께 맛도 제대로 안 나고, 팽이(곰팡이) 나분께 수십년 전 것 구하느라고 죽어나지라.”

입맛 없을 때 찬물에 밥 말아서 굴비장아찌 쭉쭉 찢어 얹어 먹는 맛이며, 아니면 뜨거운 밥에 그냥 찹쌀고추장만 찍어 먹어도 좋다. 그 맛은 속살 고운 성숙한 우리네 여인의 향기처럼 혓바닥에 휘감기고야 만다. 매콤한 스파게티 소스, 매운 카레, 초콜릿이 달콤하다지만 어찌 이에 비할 것인가.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마다 메주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마다 메주가 주렁주렁 달려있다.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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