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도 토란국 끓여 먹어요"

[추석특집] 추석에 얽힌 아련한 추억들을 더듬다

등록 2003.09.09 16:18수정 2003.09.1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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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오는데 올해는 고향에 가지 못할 것 같다. 전화선을 타고 "야, 올해는 못 오지"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은 아내가 전해주는 말에도 어머님의 아쉬워하시는 마음이 묻어난다.


다섯 식구가 한 번 움직이려면 섬(제주도)이라는 특성 때문에 육지로 나가는 교통비가 장난이 아니니 엄두를 쉽게 내질 못한다. 그냥 저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추석이 다가오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추석 흉내라도 내야 할 것 같다.

a 토란대와 뿌리(뿌리 부분의 작은 것들이 토란입니다)

토란대와 뿌리(뿌리 부분의 작은 것들이 토란입니다) ⓒ 김민수

토란밭으로 나갔다.

'추석에 토란국이 빠지면 허전하지….' 쇠고기 기름이 둥둥 뜬 토란국에 파를 띄우고 송편과 함께 먹다보면 두 그릇은 기본으로 먹었다. 국을 별로 먹지 않는 내가 유난히 토란국만큼은 두 그릇 이상을 비우는 것을 보면 아내는 의아해 한다.

"참, 이상한 일이야. 국을 끓여줘도 물말아 먹는 양반이…."

아직 토란이 실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올 추석에 토란국을 끓이려면 오늘은 까서 담가놓아야 아린 맛을 없앨 수 있을 것이기에 토란대 세 개를 뽑았다. 그 정도면 우리 식구 먹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북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인지 토란이 풍성하진 않다. 그래도 우리 식구 먹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양이기도 하고, 지난 해 토란이 너무 아려서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올해는 줄기에 초점을 두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비오는 날이면 토란잎을 따서 머리에 쓰고는 삼태기를 집어들고 개울가나 논두렁으로 나갔다. 동네 개구쟁이들과 삼태기를 개울이나 논두렁에 대고 위에서부터 고기를 몰아오면 삼태기에 그득하던 미꾸라지와 붕어들….


모처럼 추석이라고 사준 옷에 토란물이 들면 "새 옷 사주면 뭐하누. 하루도 안 돼서 저렇게 토란물 잔뜩 들여오는 걸. 쯔쯔"하시던 할머니, 속이 상하시면서도 그저 빙그레 바라보시던 어머니.

a 토란대(까서 말리면 나물로 좋습니다)

토란대(까서 말리면 나물로 좋습니다) ⓒ 김민수

토란을 캐는데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선명하게 스쳐간다.

"토란은 버릴 것이 없단다.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다 먹을 수 있어."

그랬다. 토란껍질을 벗기면 정말 계란처럼 하얀 속내가 드러난다.

"아, 그래서 土卵(토란)이구나!"

아주 어린 시절에도 왜 토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토란을 까다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줄기는 까서 잘 말려두었다가 겨울이나 정월 보름에 물에 물려서 나물로 해먹는다.

나도 어머님이 그랬던 것처럼 토란 줄기를 벗기기 좋게 잘라 한 곳에 둔다. 조금 말랐을 때 까면 한 번에 쓰윽하고 잘 까지기 때문이다.

토란을 깔 때는 고무장갑이나 비닐장갑을 사용해야 손이 가렵지가 않다. 물론 많이 깔 때는 가마니같은 것을 덮어놓고는 장화를 신고 이불을 빨 듯이 밟아주지만 우리 식구 먹을 것이니 그리 많지 않아 수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장갑을 끼고는 도무지 답답해서 일을 못한다. 어려서도 그랬다.

"안 간지럽니?"
"네."

그랬다. 시골에서 생활하기에 알맞은 체질을 타고 났는지 모르겠지만 옻나무를 만져도 아무 탈이 없었고, 토란같은 것도 그냥 맨손으로 까도 남들은 간지럽다고 난리를 치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a 토란='흙알'이 순수한 우리 말인가요?

토란='흙알'이 순수한 우리 말인가요? ⓒ 김민수

오늘도 맨손으로 토란을 깠다. 푸른빛이 나는 것들은 북을 주지 않아 햇볕을 받아 그렇게 된 것들이니 내가 얼마나 농사를 건성으로 지었는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추석이 되면 늘 어머니는 큰집 제사를 준비하러 가야만 했다. 한 동네이긴 했지만 명절 때마다 이어지는 제사로 인해 명절만 되면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 듯한 묘한 기분에 맛있는 음식들이 나와도 늘 배불리 먹질 못했다.

그때 추석을 며칠 앞두고 토란을 수확하면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올해는 우리도 집에서 토란국 끓여 먹자."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머니의 마음을 헤집는 소리인지 그때는 몰랐다.

수확하는 토란은 깨끗하게 손질해서 시장에 내다 팔 것이었고, 큰집 제사준비하고 돌아오면 새벽이요, 눈 잠시 붙였다 일어나면 또 큰집 일손 도우러 가야 할 판인데 어떻게 아들 놈 하나를 위해서 토란국을 끓이며, 토란국을 끓이자면 쇠고기 반 근이라도 있어야 할 터인데 얼마나 힘든 제안이었을까.

그런데 그해 추석, 나는 토란국을 집에서 먹었다. 적어도 세 그릇 이상을 먹었을 것이다.

"야야, 그렇게 맛있니?"
"응, 나 오늘 큰집에 안 가도 되지?"
"아니, 그래도 가서 친지분들에게 인사드려야지."

그때 어머님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놈의 말이 퍽이나 마음 아프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지금도 추석 때만 되면 "우리 막내에게 줄 토란국 끓여야지"하시며 손수 토란국을 끓이신다. 그런데 올해는 그 토란국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머님도 서운하실 거고, 나도 벌써 서운하다.

그 서운함을 조금이라도 달래려면 작은 텃밭에 심은 토란을 캐서 손수 토란국이라도 끓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토란은 어머님이 손수 보내주신 것을 심어서 거둔 것이기에 어머니의 손길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a 지난 봄에 말렸던 고사리와 취나물을 물에 불리고 있습니다.

지난 봄에 말렸던 고사리와 취나물을 물에 불리고 있습니다. ⓒ 김민수

그렇게 토란을 손질해서 물에 담가놓으려 수돗가에 가보니 아내가 고사리와 취나물을 담가놓았다. 아내도 추석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나 할까. 아내도 조촐하나마 아기자기한 추석을 준비하며 유년 시절의 추석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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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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