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삶, 그 흥미진진한 드라마

데이비드 애튼보로의 <식물의 사생활>

등록 2003.09.26 09:34수정 2003.09.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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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용
데이비드 애튼보로의 경이로운 책 <식물의 사생활>은 그가 BBC 텔레비전을 위해 식물에 관한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동시에 쓴 책이다. 즉, <식물의 사생활>은 B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동명의 자연사 프로그램의 인쇄 매체판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텔레비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영상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니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움직이는 영상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250여장의 사진들로 우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목차와 서문 그리고 책 뒤의 감사의 말과 색인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1쪽에 1장 꼴로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본문의 어디를 펼치더라도 평소 주위에서는 보기 어려운 훌륭하고 뛰어난 사진들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눈은 우선 그 사진들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혹당한 눈은 본문을 읽어나가기도 전에 그냥 책장을 넘겨가면서 식물들과 그 식물들이 함께 하는 동물과 자연의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을 먼저 쭉 훑어보게 된다. 그것은 메인 디쉬가 나오기 전에 먹는 전채 요리와 같은 것이어서, 이 책을 보다 즐기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메인 디시로 들어가서도, 즉 본문을 읽어나가는 동안에도 이 사진들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진 한 장 한 장은 관련된 본문의 내용을 알기 쉽게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보충 자료이자 동시에 글만 읽고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설명해 주는 사진으로 된 각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그 쪽 또는 바로 옆 쪽에 실린 사진을 보고 나서 머리를 끄덕이곤 했다. 마치 양념처럼 사진들은 본문의 미각을 돋궈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인내력과 집중력으로 촬영된 이러한 훌륭한 사진들이 이 책의 매력 포인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그 첫 번째 순위에 오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진들은 앞서 말했듯이 보충 자료이자 각주이며 양념일 뿐이다.

이 책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인간의 시간 단위와는 다른 시간 단위로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비밀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들의 삶, 그 비밀스런 사생활을 구체적인 사실에 입각한 생생한 묘사와 학술적인 용어를 피한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유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애튼보로가 이 책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식물들의 삶에는 인간의 삶 못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식물들도 여행을 하고,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이웃들과 투쟁하며,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다른 생물들과 함께 힘을 모으기도 한다.

식물의 여행은 주로 씨앗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민들레 씨앗의 바람을 이용한 여행뿐만 아니라 물에 뜨거나 혹은 동물의 털에 붙거나 동물들의 소화 기관 안을 통과하는 방법 등을 통하여 모체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는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놀라운 것은 식물은 씨의 형태로 공간을 탁월하게 이동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여행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모래 속에서 수십 년 동안 폭우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사막 식물의 씨도 그렇거니와, 일본의 2000년 전 고대 거주지에서 발견된 목련 씨를 심었더니 소담스런 꽃을 피웠다는 사실도 식물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잎의 엽록소에서 광합성으로 먹이를 만드는 식물은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같은 식물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이 생존 경쟁은 때로는 식물의 잎을 먹이로 삼는 크고 작은 많은 동물들과의 싸움이 되기도 해서, 식물은 날카로운 가시나 독성분 등과 같이 잎을 보호하기 위한 갖가지 방어수단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습지대나 수렁지대 혹은 빗물에 씻기는 산비탈처럼 특별히 생존 여건이 가혹한 지역에서는 오히려 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동물들을 먹이로 삼기도 한다. 병자초나 끈끈이주걱, 파리지옥풀 등이 그러한 식물들이다.

그런가 하면,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식물의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바람을 이용하여 꽃가루를 퍼뜨리는 것이지만, 보다 확실한 꽃가루받이를 위하여 곤충들과 새들 그리고 작은 동물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때 식물들은 화려한 색깔의 꽃과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향기 그리고 달콤한 꿀로 그들을 유혹한다.

그런데 어떤 식물들은 암컷의 모양과 닮은 꽃들을 피워냄으로써 수컷을 유인하는 성적인 기만술을 사용하는 기발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암펄과 닮은 꽃을 피어내는 난초 종류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렇게 눈물겨운 노력으로 씨앗을 만들고 후손을 퍼뜨린다고 해도 그 씨앗에서 나온 어린 새싹들이 전부 어른 식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은 개체들 간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과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러야 한다. 산불은 때로 이러한 생존 경쟁에서 뒤진 식물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식물은 다른 생물들과 공생함으로써 어려운 생존 여건을 극복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산호의 폴립 속에 들어가 사는 조류(藻類)가 그렇고, 개미를 하숙생으로 받아들이는 등나무와 아카시아가 그렇다. 뿐만 아니라 식물은 곰팡이와도 밀접한 공생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흔히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는 이끼류도 사실은 조류와 곰팡이가 공생 관계로 결합한 것이다.

이렇듯 식물도 인간이나 동물 못지않은 극적인 삶과 그 삶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과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식물들이 우리 인간과는 다른 시간 단위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애튼보로는 누구인가

영국의 저명한 TV 프로그램 제작자이자 저술가인 데이비드 애튼보로 경(Sir David Attenborough)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어린시절 그의 고향인 레스터(Leicester) 부근의 들에서 ‘새 관찰하기’와 ‘화석 모으기’를 했던 때로부터 시작된다.

켐브리지 대학과 2년 간의 해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한 출판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BBC 텔레비전에 들어갔다. 아직 흑백 TV의 초기 시절이었던 당시, 그는 그곳에서 <동물원 탐구>라는 영상물과 그 밖의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정치물과 심지어 발레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1965년 인류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사임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BBC는 그를 BBC 2의 책임자로 복귀시켰다. 여기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그는 영국에 컬러 TV를 소개했고 <문명과 우리들의 세계>로부터 <당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제작, 방영했다. 1969년까지 그는 BBC 텔레비전의 두 채널에서 일했다.

1973년에 그는 관리직을 모두 포기하고 마침내 저술과 영상 제작에 뛰어들었는데, 그가 시작한 첫 번째 일은 보르네오의 한 동굴 속에 있는 박쥐의 똥 속에 무릎 깊이까지 빠진 채로 서 있는 일이었다. “내게는 그 일이 더 적성에 맞더군요.”

그 후로 그의 저서와 TV 프로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인기를 누려왔는데, <식물의 사생활>은 그의 작업의 중심이자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온 모든 연구들의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다.
데이비드 애튼보로는 <식물의 사생활>에서 이러한 식물들의 삶을, 우리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식물들의 시간에 입각해서 그리고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식물들의 시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식물도 인간이나 동물 못지않은 훌륭하고 뛰어난 생명체라는 사실을 조용히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식물들은 생존 능력에 있어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동물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식물들은 동물들이 잠시도 살 수 없는 혹독한 생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며 일부 식물들은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식물이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져있는 이 지구상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는 식물들이 견디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인간의 고의적인 파괴 행위이다. 저자는 그러한 파괴 행위가 곧 인간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임을 경고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 십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 우림을 파괴하는 인간의 파괴 행위가 계속된다면, 그들이 먹는 풀이 만들어내는 독에 의해서 집단 자살로 유도되는 노르웨이 레밍의 슬픈 운명처럼 인류의 미래도 비극으로 끝을 맺게 되리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애튼보로의 경이로운 책 <식물의 사생활>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리라.

식물의 사생활

데이비드 애튼보로 지음,
까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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