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야! 여름내 농사짓느라 수고가 많았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09.25 06:05수정 2003.09.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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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박철
오리논 옆을 지나가면 오리들이 주인이 밥 주러 나타난 줄 알고 좋다고 꽥꽥거립니다.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서면, 이 놈들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금방 경계태세를 취합니다. 여차하면 다 내빼고 맙니다.


오리 중에서도 대장오리가 있습니다. 이 놈이 맨 앞에서 진두지휘를 합니다. 논으로 일 나갈 때에도, 잠자러 집으로 들어 올 때도, 낯선 사람이 와서 도망갈 때에도 대장 오리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갑니다. 청둥오리와 집오리 교배종인데, 얼마나 약아빠졌는지 모릅니다.

느릿느릿 박철
해마다 교동에서는 오리농가 작목반을 중심으로 대규모 오리입식 행사가 벌어집니다. 올해도 지난 5월 도시지역 소비자 공동체와 연대하여 수백 명의 외지 사람들이 교동에 들어와 한마당 축제와 오리입식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이 오리 새끼를 한 마리씩 받아 쥐고 있다가, 오리논 작목반 대표가 징을 치면 일제히 오리를 논에 풀어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오리야! 올해농사 잘 부탁한다.”
“오리야! 수고해 다오.”


느릿느릿 박철
올해 오리입식 축제에는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이 비를 쫄딱 다 맞으면서도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추워서 덜덜 떨면서도 얼굴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농부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논에 오리를 집어넣은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가을걷이를 시작할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른 벼들은 벼 베기를 시작한 집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열흘만 지나면 가을걷이가 절정을 이룰 것 같습니다.

24일 오후 카메라를 들고 오랜만에 오리논에 나가 보았습니다. 일찍 모내기를 한 농가에서는 벌써 오리들을 논에서 다 빼냈습니다. 오리를 논에서 빼지 않고 놔두면 오리들이 새로 생긴 말랑말랑한 벼 이삭을 다 훑어 먹기 때문에 오리를 논에서 빼내야 합니다.


느릿느릿 박철
들판이 황금물결입니다. 늦장마가 끝나고 들판은 풍요롭습니다.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자, 벼들이 춤을 춥니다.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비행을 하고, 오리논은 일체 농약이나 제초제를 주지 않아서 메뚜기들이 벼 사이로 날아다니는 데 얼마나 동작이 빠른지, 어린시절을 생각하고 한 마리 잡아보려고 했지만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도저히 역부족이었습니다.

교동 인사리 작목반 총무 안병집씨를 만났습니다. 안병집씨는 교동에 처음 오리논농사를 시작한 분입니다. 남들보다 늦게 모를 내서 아직 오리를 논에서 빼지 않았습니다. 먼저 오리한테 인사를 했습니다. “오리야! 여름내 농사짓느라 수고가 많았다.” 오리들도 반갑다는 듯 연신 꽥꽥거립니다.


느릿느릿 박철
-올해 작황이 어떤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잘 되었어요. 비가 적기에 왔고. 이제 비가 그만 왔으면 좋겠는데, 더 두고 봐야죠. 태풍이라는 것이 가을걷이 때 한 번은 지나가게 되어 있잖아요.”

-올해 오리 유기농 논농사 몇 년 째이지요?
“올해가 6년차이지요. 벌써 그렇게 됫시다.”

-교동 오리논 농사 규모는 어느 정도 입니까?
“이제 많이 늘었어요. 지금은 30여 가정으로 늘었고 대략 15만 평 규모이시다.”

느릿느릿 박철
-그래, 오리논농사 해보니까 어때요?
"땅을 살리는 것 아니겠시꺄? 내 자식 놈에게 죽은 땅이 아니라, 살아있는 땅을 물려 줄 수 있다는 거 아니겠시꺄. 목사님도 오리논 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힘들어요. 오리를 논에 집어넣었다고 오리가 다 해주는 것 아니잖아요. 호미 들고 논에 들어가서 뜨거운 뙤약볕에 그 넓은 논을 쪼그리고 다니며 김을 매주어야 하고 힘들어요. 그냥 관행농으로 하는 것보다 몇 갑절 손이 가요. 그래도 재밌어요. 남들이 안하는 걸 하는 것이니 자부심도 느끼고….”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이 흙 속에서 나옵니다. 오리논 농사는 결국은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단순히 쌀값을 더 받을 수 있으니 오리논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땅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느릿느릿 박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아주머니들을 만났습니다. 고추를 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사람 키만한 고추대 사이를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습니다. 완전 고추정글 지대입니다. 내가 인사를 하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현상이 할머니가 한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지난 번 내가 콩밭 매는 것을 찍더니, 오늘은 고추 따는 것 까지 찍어요. 사진을 찍으면 사진을 줘야지 사진도 안주면서 왜 사진만 찍는담?”

그러면서도 현상이 할머니는 싫지 않은 기색이십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아무 때고 사진을 찍는 파파라치로 통합니다. 고추 바구니에 빨간 고추가 가득합니다. 고추가 자기도 한 장 박아 달라고 웃고 있는 듯 합니다. 깊어 가는 가을, 지난 태풍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모든 고난을 떨쳐버리고 농부들의 마음도 풍성한 가을 들판처럼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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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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