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밭에서 소녀를 떠올리다

구리시 한강시민공원 4만평 코스모스 밭을 다녀와서

등록 2003.09.25 09:33수정 2003.09.2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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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
“가을 노래 뭐 좋은 거 없을까? 가사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은데….”
“글쎄….”
“한번 생각해 봐.”
“그냥 콧소리로 흥얼거려도 괜찮아?”
“응.”


중학교 2학년, 3학년 두 아이는 각자 감청색, 연초록 가방을 들고 가을 산길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 양 옆으론 소도 뜯지 않는 코스모스가 소녀와 소년을 감쌌다. 품었다. 향기도 싸하게 스며들었다.

얼마 걷지 않아 누군가 흥얼거린다.

“음~음음~음 음~음음~음 으으으으음~
음~음음~음 음~음음~음 으음음~음음….“

아직 검정치마에 하얀 반팔 블라우스 입은 소녀, 회색바지에 하늘색 상의 하복을 입은 소년은 하얀 꽃을 보면 창백해지고, 분홍 꽃을 보면 발그레 수줍어한다.

“후두두둑 척-.”
풀무치 날아 길을 안내한다.


김규환
앙큼한 마음을 품은 남자 아이가 손을 잡으려 머뭇머뭇 거린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아직 꽃망울을 터트리지 않은 코스모스가 손등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니 속마음 들킨 듯 손과 얼굴 붉어지고 심장마저 쿵쾅쿵쾅 난도질을 한다.

“야, 우리 꽃잎 튕기기나 하자.”
“왜? 계속 노래 부르며 걸으면 되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알았어. 그럼, 난 주황색으로 따줘.”
“난 뭘로 할까?”
“그냥 순수한 맘 변치 말라는 뜻에서 하양으로 해.”


청춘 남녀는 꿈같은 우주로 난 희망의 길을 걸으며 꽃잎 튕기기를 하기로 했다.

“시~작!”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야, 내가 이겼다.”
“처음부터 뭐야.”
“얼른 대란 말야.”
“살살 때릴 거지?”
“응.”

“톡!”
“앗야!”

“가위 바위 보!”
“야, 이번엔 내가 이겼다.”
“호~, 튕!”

김규환
무던히도 가운데 손가락을 튕겨 이마를 멍들게 했다. 번갈아 가며 시소게임을 하다 보니 이마도 만지고 가녀린 머리카락도 만지다 보니 소년은 갓 태어난 태양처럼 아까보다 더 마음이 이글거렸다.

둘은 만난 지 오래되었지만 오늘 처음 이렇게 오래 걷고 있다. 들녘엔 벼가 누렇게 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소녀라고 무덤덤한 게 아니었다. 약할 것만 같던 아이가 제법 손맛도 매섭고 아귀힘도 보통이 아닌 걸 온 몸으로 짜릿하게 느꼈다.

한쪽으로 덜커덩거리는 자전거 한대가 일부러 “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김규환
둘에겐 더 이상 학교 공부도 허름한 집안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꿀벌이 톡톡 한번 씩 노란 암술을 치고 다시 엉기듯, 범나비 부르려고 연지곤지 찍어 바른 듯 꽃 길을 더디 걷고 있다.

기어이 손을 잡으려 머뭇거리다 이번에도 여의치 않다. 가을 하늘과 꽃빛깔에 취한 두 아이는 아무데고 앉고 싶다. 이성을 잃은 듯 쉴 곳을 찾아 앉고는 멀뚱멀뚱 한 참 말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왜?”
“뭘?”
“…….”
“…….”

김규환
산들바람이 지나가자 코스모스 한들거리고 까치가 ‘길손 온다’, ‘부끄럽다’, 우짖어도 둘은 한 동안 부등켜안고 첫 입맞춤을 했다. 입을 떼자 달콤한 향기에 싸늘하고 씁쓸한 향기가 몰려왔다.

소녀 눈엔 시린 가을하늘 저녁 이슬이 맺혔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오솔길엔 시린 추억이 맴돌았다.

20년이 지났건만 그 길은 아련히 멀어져만 간다.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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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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