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1)-치악산 구룡사

역사와 사진 속의 유물이 된 대웅전과 불상을 다시 보며

등록 2003.10.10 16:47수정 2003.10.1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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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의 사천왕문은 여느 절들의 사천왕문에 비하여 특이하게 2층 구조로 되어있다. 물론 내부로 들어서면 통층의 공간에 우람한 규모의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지만 외관상으로는 2층의 형태로 건조되어 있다.
구룡사의 사천왕문은 여느 절들의 사천왕문에 비하여 특이하게 2층 구조로 되어있다. 물론 내부로 들어서면 통층의 공간에 우람한 규모의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지만 외관상으로는 2층의 형태로 건조되어 있다.임윤수
먼 후일 보게될 구룡사 사적기에 2003년 9월의 마지막 밤은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하다. 강원도 원주시 소포면 학곡리 1029번지에 소재해 있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구룡사 대웅전이 9월의 마지막인 30일 밤 9시 4분 경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했다.

조선 후기인 1807년에 건축된 팔작지붕에 다포형태를 하고 있는 단아한 목조의 대웅전만이 아니라 그 안에 모셔놓았던 3분의 불상도 완전 전소했다. 그 외에도 탱화와 소종 그리고 법상과 법고 등은 물론 다수의 불기와 시설들이 타버렸다.


정확하게 25개월 전인 2001년 7월 8일 구룡사에 들렸을 때 카메라에 담아 놓은 그 대웅전과 불상들을 이젠 사진에서야 보아야 한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가끔 현존하지 않는 유물을 사진으로만 보며 많은 아쉬움을 가졌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니 믿어지지 않는다.

많고 많은 산중에 그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는, 10개가 넘지 않는 몇몇 산 중 하나가 치악산이다. 바위가 많고 험하기에 이름에 '악'이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종가(宗家)나 종손처럼 산중에서 제일 어른의 산(즉, 큰 산)인 산종(山宗)에 '악'자가 사용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보광루 아래로 들어서 까치발 돋듯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대웅전이 있었다. 그러나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보광루 아래로 들어서 까치발 돋듯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대웅전이 있었다. 그러나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임윤수
그런 치악산 북쪽계곡에 자리한 구룡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구룡사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구룡사로 들어서는 진입로의 계곡과 소롯길은 가히 일품이다.

웬만한 절 치고 진입로 좋지 않은 곳이 있겠냐마는 구룡사 진입로는 산 이름에서 예견되는 험하고 급한 경사와는 영 딴판이다. 시골 마을끼리 이어주는 산모퉁이 농로처럼 완만한 경사에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산줄기와 계곡을 따른 구불구불함이 있다. 게다가 수백년은 되었을 울창한 노송이 만들어 주는 그늘은 한낮에도 태양 빛 한 점 볼 수 없고 코끝엔 솔향이 뭉턱뭉턱 묻어나는 그런 길이다.

궁색한 기억 속에 있는 대웅전이 자꾸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참 불사중인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 사천왕문 앞 공터에 다다랐으나 호들갑스럽게 상상하였던 그런 모습, 그을리고 어수선한 그런 모습은 아니다.


이제는 사진과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웅전의 모습이다. 2년여 전 구룡사를 찾았을 때 구룡사 대웅전은 이렇게 단아한 형태로 건재하였다.
이제는 사진과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웅전의 모습이다. 2년여 전 구룡사를 찾았을 때 구룡사 대웅전은 이렇게 단아한 형태로 건재하였다.임윤수
최소한 사천왕문 밖의 모습에서 예전과 달라졌을 구룡사의 뭔가가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았다. 구룡사의 사천왕문은 여느 절들의 사천왕문에 비하여 특이하게 2층 구조로 되어있다. 물론 내부로 들어서면 통층의 공간에 우람한 규모의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지만 외관상으로는 2층의 형태로 건조되어 있다.

사천왕문을 들어서 숨가쁘게 올라서야 하는 대웅전 경내 마당과 높낮이 차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높게 건축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문이 있는 바닥과 대웅전이 있는 경내 마당은 꽤나 높이 차이가 난다.


급경사의 오름길에 단층으로 야트막하게 사천왕문이 들어섰다면 왠지 어색하고 왜소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을 듯하다. 규모와 형태에서 주변과 조화를 이룬 선인들의 지혜와 예술성이 느껴진다.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보광루 아래로 들어서 까치발 돋듯 돌계단을 오르니 눈앞이 허전하다.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

뉴스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궁색하게 그려보았던 화재 현장이 실물로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비록 정돈되어 아수라장이 되었을 화재 당시의 어수선함은 보이지 않지만 있어야 할 대웅전이 빠져버린 공간은 허전하다.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
사진에 있고 기억이 생생한 대웅전은 간데 없고 그을음에 거무티티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휑한 공간에 흰색 현수막만이 나풀거린다.임윤수
떠나버린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기억되고 잃어버린 소지품이 더 귀중해지듯, 정말 사진 속에만 남아 있어야 하는 그 대웅전이 값진 문화재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몸을 낮추게 하였던 불상도 온데간데없고 타다 남은 목탄 조각만 보일 뿐이다. 부서지고 깨어져 흩어진 기와조각과 숯검정으로 변해버린 목조들이 화재 당시 우왕좌왕했을 스님들과 사람들의 하염없는 당혹감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저녁으로, 불공이 있을 때면 법당에서 영락없이 사용되었을 동제(銅製) 소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반쯤은 녹은 상태에서 흘러내린 흔적이 당시의 뜨거움을 짐작케 한다.

정돈된 화재 현장과 새로 불사되어 전에는 보지 못했던 전각들을 둘러보고 대웅전이 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을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꼬리를 문다. 한참 그곳에 서있다 종무실을 찾았다.

종무실을 찾으니 때가 때인지라 주지인 자광스님(李遠行)은 정신없이 바쁘시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전화를 받고, 이미 와 있던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한참을 기다리다 스님께 인사 드리고 몇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저절로 두 손을 모으게 하였던 목불(木佛)도 이젠 사진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절로 두 손을 모으게 하였던 목불(木佛)도 이젠 사진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임윤수
스님은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탓에 부처님께 누가 되었음은 물론 문화재를 소실시킴으로 역사와 후손들에게 죄인이 되었다'고 하시며 보는 이 민망하도록 자책을 감추지 않으셨다.

어떠한 경우도 화재 전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지만 혼신을 다하여 원상에 가깝도록 복원을 하여 놓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기도하며 전문가와 관계기관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하였다.

화재가 있고 며칠 간은 스님께서도 어찌할 줄 몰라 마음을 놓고 있는데 85세 된 할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스님을 찾아왔었다고 한다. 한 여름 고추를 따서 벌어들인 돈이라고 하면서 몸빼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내 놓으시며 '원력을 세워 하루라도 빨리 복원을 해 달라'고 애원하듯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천재라 할 태풍매미에 상처입고 쇠락해가는 경제에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의지처이며 희망의 공간이었던 대웅전과 부처님을 하루라도 빨리 복원해야 한다'고 채근하듯 말씀하시며 신신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수천 수만 불자들의 경배대상이었던 불상도 불에 타니 한 조각 목탄조각일 뿐이다.
수천 수만 불자들의 경배대상이었던 불상도 불에 타니 한 조각 목탄조각일 뿐이다.임윤수
노 할머니의 이런 말씀을 듣고 스님께서도 '아!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죄를 덜기 위해서라도 마음 다잡아 하루라도 빨리 복원을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셨다 한다.

문화재였던 구룡사 대웅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현존물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문화재를 창조한다는 그런 각오로 복원불사에 임하겠다고 하신다. 오는 24일 기공식에 이어 2004년 3월에 봉불식을 갖고 4월 5일 준공을 예정으로 복원 불사가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아주 얄미운 소리 중 하나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말을 쓸 수밖에 없다. 구룡사는 불행 중 다행으로 대웅전을 포함한 모든 전각에 대해 실측한 상태라고 한다.

2000년 12월 구룡사 주지로 부임한 자광스님은 유물의 보존과 보수 등에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모든 전각에 대한 실측도를 구축하여 놓아 복원에 절대적인 자료가 확보된 셈이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화재현장을 제일 가까이 지켜보았을 언덕에서 바라본 구룡사는 왠지 허전하다. 대웅전이 복원되면 그 허전함을 덜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화재현장을 제일 가까이 지켜보았을 언덕에서 바라본 구룡사는 왠지 허전하다. 대웅전이 복원되면 그 허전함을 덜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임윤수
숯 조각이 되어버린 예전의 목불(木佛) 불상은 강원도의 특성을 사리기 위해 철불(鐵佛)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구룡사는 한문으로 龜龍寺로 쓰고 있는데 예전에는 구룡사(九龍寺)로 썼다. 아홉 구(九)자에서 거북 구(龜)자로 바뀐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한 스님이 명산인 치악산에 큰 절을 세우고자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 주변을 살펴본 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에 연못이 있었다.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 했는데 연못 속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의 용들로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못을 메우겠다는 스님과 메울 수 없다는 용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용들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 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용들이 먹구름을 불러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져 삽시간에 스님이 서 계신 곳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배를 준비하였던 스님은 태연히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구룡사의 유구한 역사를 한 눈에 읽게 해주는 부도전도 오늘은 왠지 허전해 보인다.
구룡사의 유구한 역사를 한 눈에 읽게 해주는 부도전도 오늘은 왠지 허전해 보인다.임윤수
용의 공격이 끝나자 스님은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한다. 용들은 그 뜨거움을 견딜 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 중 눈먼 용 한 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한다.

내기에서 이긴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어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앉게 되었다 한다. 이 절터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은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한다.

역할에 따른 권리가 주어지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룡사 주지는 뇌물을 받는 등 타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구룡사는 물질적으로는 풍성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주지인 자광스님은 '석고대죄'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화재를 창조한다는 각오로 복원불사에 전념하겠다 하신다.
주지인 자광스님은 '석고대죄'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화재를 창조한다는 각오로 복원불사에 전념하겠다 하신다.임윤수
이럴 즈음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어 버리니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절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된 어느 날 또 다른 도승 한 분이 찾아와서는 '이 절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몰락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를 흘리지 아니하고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하고 재차 물으니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 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 동강으로 내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이에 주지스님이 그 처방을 물으니 도승이 답하기를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로 쓰면 될 것'이라 일러주기에 그 다음부터 절의 이름은 거북구(龜)자가 들어가는 구룡사(龜龍寺)로 쓰게 되었다 한다.

솔향 그윽한 숲길을 걸으면서도 화재 현장이 왠지 자꾸 눈에 거슬린다. 목조건물인 산사의 대부분이 어찌 보면 화재에 무방비상태임을 알기에 검게 그을린 그 목탄들이 자꾸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솔향 그윽한 숲길을 걸으면서도 화재 현장이 왠지 자꾸 눈에 거슬린다. 목조건물인 산사의 대부분이 어찌 보면 화재에 무방비상태임을 알기에 검게 그을린 그 목탄들이 자꾸 떠오르는지도 모른다.임윤수
많고 많은 산사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 전란이나 재난에 의해 전소되고 중건되는 애석한 기록들이 있다. 안타깝게 구룡사도 그런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전설 속에 승천하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이 천 년 넘게 모아진 불자들의 불심으로 승천하는 과정에 발생한 성스런 화염이 우리 눈에 비추어진 화재였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이며 말장난일까?

구룡사의 화재 현장이 왠지 자꾸 눈에 거슬린다. 목조건물인 산사의 대부분이 어찌 보면 화재에 무방비상태임을 알기에 검게 그을린 그 목탄들이 자꾸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불교계는 물론 문화재관리국에서도 차제에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책으로라도 이런 불행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했으면 좋겠다.

하기 쉬운 말과 쓰기 쉬운 펜으로만 하는 유야무야한 대책이 아니고 실전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적 대책 말이다.

먼 후일 구룡사의 사적기에 이번의 화재와 복원이 어떻게 기록될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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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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