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주의자이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자연이 주는 은총

등록 2003.10.19 21:49수정 2003.10.2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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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시골에서 살다보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자연이 주는 무상의 은총이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새들의 향연이 시작된다. 각종 새들이 바로 내 앞까지 날아와 아침인사를 한다. 그런 광경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또 저녁 나절 부엌 개량이 되지 않은 집에서는 이맘때도 새벽 한기를 면하기 위해 군불을 지폈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굴뚝에서 연기가 되어 오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요즘은 집집마다 시골 아낙네들은 밭작물을 거둬들이기 위해 바쁘다.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아 작대기로 콩대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면 참 정겹고 좋다. 작대기를 두드리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전거타고 장보러가는 장면도 보기 좋다. 시골 풍경은 빠르지 않다. 느긋하고 여유롭다.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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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초등학교 애들이 수업을 마치고 떼를 지어 걸어오는 모습도 보기 좋다. 도시에서 사는 애들처럼 각종 과외로 시달릴 필요가 없다. 시골에는 학원이 없다. 어머니의 치맛바람도 불지 않는다. 학교수업이 끝났는데도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고 어둑해질 때까지 학교운동장에서 놀다 간다. 애들 표정이 밝고 인사성도 바르다. 아무나 한 대 쥐어박아도 해맑은 얼굴로 웃는다.

사시사철 제철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다. 자기 집 텃밭에서 나온 것으로 모든 먹을거리를 충당한다. 기껏해야 비린 생선이나 돼지고기를 사먹는 것 외에는 전부 자급자족이다. 햇봄 된장을 담아 늦가을 곰삭은 된장에 풋고추만 넣고 짭짤한 장국물에 뜨거운 밥을 비벼 먹어 보았는가? 고기반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금방 밭에서 따온 푸성귀에 밥을 얹고 된장을 발라 싸먹는 것도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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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요즘은 동네마다 게이트볼장이 생겨서 가을걷이를 끝내고 동네 사람들마다 쇠몽둥이를 들고 게이트볼을 한다.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한편이 되기도 하고, 남편과 아내가 다른 편이 되어 실력을 겨루기도 한다. 가끔 옥신각신하기도 하지만 그 구경도 볼만하다.


겨울이면 마을 회관에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지나간 이야기가 나오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다 부녀회에서 국수라도 삶아 내는 날은 진짜 재수좋은 날이다. 뜨끈한 국수를 먹고 나면 뱃속까지 뜨듯해 진다.

가을 상수리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시락을 싸서 아내와 산보 겸 상수리를 주우러 산을 오른다. 상수리를 정신없이 줍느라 때를 놓쳐 아내와 둘이 낯선 남의 산소 앞에 앉아 늦은 점심을 한다. 아내의 머리는 온통 검불투성이다. 아내가 말한다.
“여보, 우리 거리의 노숙자 같다.”
거기에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하면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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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겨울에도 산에 오를 때가 있다. 일부러 눈이 많이 온 날을 택하여 산을 오른다. 산꼭대기에 올라 눈구덩이에서 눈을 파헤치고 버너에 코펠을 얹어놓고 김치를 끓인다. 거기에 라면을 넣는다.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라면이 끓기도 전에 코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라면이 다 끓었으면 밥을 넣고 말아 먹는다. 영하의 날씨에 눈구덩이 위에 웅크리고 앉아 라면을 먹으면서 우리는 에베레스트 트래킹을 상상한다.

봄에는 들로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간다. 남자가 나물을 뜯는 건 조금 창피하다. 그러니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간다. 교동에서 제일 많은 나무가 상수리나무와 산초나무이다. 사람들이 상수리나무는 잘 알아도 산초나무는 모른다. 열 명 중 아홉은 모른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산초나무를 모른다. 무슨 가시나무인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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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재작년 우리 내외는 산초 씨앗을 두가마니가 넘게 땄다. 산초기름이 해소천식에 특효약으로 알려져 있고, 시중에서 비싸게 판매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거의 한 달 동안 산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손가락에는 배구선수들처럼 반창고를 칭칭 감고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산초를 땄다. 한 달 동안을 그렇게 보내니 온몸이 가시에 찔려 상처투성이였다.

산초를 말려 기름을 열댓병 만들었는데, ‘이거 다 팔면 100만원도 넘어!’하고 좋아했지만 결국은 한 병도 팔지 못했다. 선물로 주다 보니 누군 그냥주고 누구에게는 돈을 받을 수 있겠냐고…. 그래도 좋았다. 그 때처럼 아내와 밀착된 적이 없었다. 그 때 너무 혼이 나서 이제는 산초 따러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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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서해안은 저녁 노을이 볼만하다. 그것도 가을철 저녁의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 아내가 빨래를 걷다가 소리를 지른다. 아니면 내가 외출했다 돌아오다 노을을 보고 소리를 지를 때도 있다. 노을이 온 들판을 붉게 물들이면 내 마음까지도 붉게 물든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오른다. 가을바람도 좋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좋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철새들이 수십 마리, 어느 때는 수백 마리가 V자로 비행을 한다. 그러면 나는 꿈 많던 유년시절로 돌아간다.

내가 시골에서 살면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새벽에서 아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특히 늦가을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어둠이다. 어둠 속을 뚫고 달린다. 차츰차츰 어둠이 가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둠이 오간데 없이 사라진다. 한 점(點)의 찰나이다. 동편으로부터 해가 솟아오른다. 달리기를 하면서 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그 순간 하느님께 내가 살아있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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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시골에서 살다보면 인간의 허명과 헛된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저절로 배우게 된다. 오늘도 나는 자연을 통해 무상의 은총을 누린다. 늘 자연에 감사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대로 나는 자연의 품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누가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자연주의자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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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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