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삶을 닮은 억새풀을 바라보다

북제주군 교래리 산굼부리에서

등록 2003.10.23 07:16수정 2003.10.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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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늘이 열리는 듯 산굼부리에서 바라본 오름들의 행렬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하늘이 열리는 듯 산굼부리에서 바라본 오름들의 행렬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 김민수

제법 바람이 차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는 게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계절은 또 다른 계절을 향해서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가장 예쁘게 피었을 순간에 억새를 보자고 차일피일 미루며 길가와 오름에 피어있는 억새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늘 마음 한켠에는 북제주군 교래리의 산굼부리 억새가 그려졌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이다. 오후 3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간식을 먹이고는 부지런히 억새가 만발할 교래리 산굼부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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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그렇게 가을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 날 산굼부리 억새밭에 섰다.
'와!'
아이들의 입에서도 무성한 억새밭이 장관으로 보이는지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단지 이 곳에 왔다는 것으로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니다. 내가 굳이 아이들을 데리고 억새밭을 찾은 것은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었고, 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마음 한켠에 아름다운 풍경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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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억새를 볼 때마다 나는 김수영(金洙暎) 시인의 '풀'을 떠올린다.

......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그리고 이어서 풀뿌리 민중들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억새와 민중들의 닮은꼴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인 편견일지 모르지만 억새는 홀로 아름답지 않다. 함께 어우러져 군락을 이루고 있을 때 아름답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늘 역사의 변방에 있었고, 우리네 역사는 늘 영웅중심의 역사였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에서도 민중은 늘 소외되어 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우는 연약한 존재같지만 결국에는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 것이 민중이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질 때 가능한 일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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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억새의 이파리는 날카롭지만 이삭은 부드럽고, 그 우거진 수풀 어딘가에 무언가를 감싸안고 있다. 어린시절 들에 나가 뛰어 놀다 보면 억새 이파리에 손가락을 베이곤 했다.

때로는 상처가 덧나 오랫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싸한 아픔에 선홍색의 붉은 피를 입으로 빨아내고 나면 이내 아물곤 했다.
여섯 살짜리 막내가 억새이파리가 예쁘다고 만졌다가 처음으로 손을 벤인 날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엉터리야, 이거 만지면 이렇게 된다고 말했어야지."

아마 아이에게 말해줘서 아이가 만져보지 않았다면 억새이파리가 가지고 있는 그 날카로움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파리에 비해 이삭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새로 돋아나는 이삭은 마치 솜이불 같아서 볼에 비벼도 얼마나 풋풋한지 한 줌 꺾어 책상에 한 번쯤 꽂아본 추억이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억새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억새풀에 기생하고 있는 야고외에도 수많은 새와 들짐승들이 깃들 수 있는 집과 넉넉한 공간이 있다.

민중들의 투박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무뚝뚝하고 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들의 품에는 부드러움이 있고 따스함이라는 넉넉한 공간들이 있다. 세상살이에 지쳐 아옹다옹하다가도 대의명분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을 아무 미련 없이 버릴 수고 있고, 옳은 길이라면 계산하지 않고 그 길을 간다. 비록 꺾여진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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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억새는 씨앗과 뿌리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감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억새풀을 태우는 행사를 하는 곳이 있다. 너무 우거져서이기도 하지만 억새풀을 태우면 그 재는 좋은 거름이 된다. 그렇게 활활 태우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데 어김없이 또다시 새싹을 내고는 지천에 피어난다.

우리네 민중들은 모진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면면히 이 땅을 지켜왔다.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그 순간에도 민중들은 맨 몸으로 일어섰다. 그래서 이름도 없는 '아무개'로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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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억새는 어떤 풍경도 잘 조화시키는 매력이 있다. 일출, 일몰, 하늘, 오름, 산, 나무, 꽃 가릴 것 없이 억새는 그들과 하나되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주인공이면서도 조연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들어 간다. 이것이 억새의 매력이요 민중과 닮은 점이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가을 햇살에 은빛으로 빛난다.
이제 자신의 때가 다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기자기한 풀과 꽃이 들판을 물들인 후에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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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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