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 사이의 맛을 일깨우는 책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등록 2003.11.04 06:14수정 2003.11.0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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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비평사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제목 그대로 ‘답사’에 충실하다. 그의 글은 마치 현장에서 그의 설명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그래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는 것은 곧 유홍준 교수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곧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슬라이드 강의를 듣는 것이다.

나는 1989년에 그의 슬라이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게는 평범한 사진들에 불과해 보이는 슬라이드 필름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거기에서 잊혀진 역사의 숨결과 숨겨진 문화예술의 미학을 불러내오는 그 기막힌 솜씨에 나는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그가 글로 쓴 슬라이드 강의이다.

그런데 그의 슬라이드 강의에는 준비된 원고가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는 원고를 읽지 않는다. 슬라이드 강의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진행되기에 원고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슬라이드 강의용 원고는 슬라이드 필름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아니 그 필름을 보는 그의 눈에,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다.


건물의 건축학적 특징과 아름다움, 건립에 따른 역사적 배경과 창건자에 대한 이야기, 터와 전망과 관련된 풍수지리적 해석,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절집이 지니고 있는 현재적 의의에 이르기까지, 그가 한 장의 슬라이드 필름 안에 담긴 절집 사진에서 불러내오는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방대하다.

이 모든 지식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한없는 애정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그리고 남다른 감식안에 젖줄을 대고 있을 터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그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슬라이드 강의가 끝나고 쓰여진 강의 원고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니 이 책은 아카데믹한 ‘답사’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재미있게 읽힌다. 그것은, ‘답사’의 인솔자라는 책무에서 벗어나 ‘여행’하는 나그네의 심사로 돌아가 그가 풀어놓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와 거기에서 뻗어나가는 비판적 사유가 책의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문화유산의 잊혀진 역사와 숨겨진 미학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줄 때, 그것이 ‘어제의 것’이 아닌 ‘오늘의 것’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힘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다름 아닌 이 부분이며, 3권으로 펴낸 그의 답사기의 제1권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를 읽는 진정한 즐거움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산 초당 답사의 말미에 소개한 윤한봉의 일화는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과 오버랩 된다. 윤한봉은 광주민중항쟁의 주모자로 지목돼 미국으로 밀항했던 사람이다. 시간이 흘러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한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아 유홍준의 슬라이드 강의를 통해 6년 만에 비로소 고향 땅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경주 답사의 말미에 소개한 불국사 박정희 대통령 신종의 이야기는 에밀레종 이야기와 비교되면서 선인들의 그 놀라운 장인정신과 예술혼을 다시금 되새기도록 한다. 문경 봉암사 답사에 앞서 그가 불교신자인 아내와 주고받은 대화, 그리고 그 답사의 말미에 소개한 ‘가양주 9단’의 이야기는 한적한 산사에 호사스런 법당을 짓는 것이 어째서 반문화적이고 반종교적인 행위인지를 그 어떤 말보다 더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중부휴게소, 망향휴게소에 세워진 정자에서 그가 발견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정자 문화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담양의 그 많은 정자와 원림의 드높은 가치를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우리 향촌의 들판 한쪽에 외롭게 서있는 모정의 건강함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처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며, ‘답사기’와 ‘여행기’의 사이에 존재한다. 그가 ‘답사’를 벗어나 ‘여행’으로 들어설 때, 그의 ‘답사’는 더 빛나 보이고, 그것이 그를 ‘여행’에서 다시 ‘답사’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이 ‘학삐리 리론가’가 그의 계속되는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좀 더 ‘여행’쪽으로 기울어 있을까? 나는 아직 모른다. 북한의 문화유산답사기까지 포함하면 모두 5권이 나왔다고 하는데 나머지 책들도 읽어볼 일이다.

유홍준은 누구인가

유홍준은 1949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의 예술철학 전공을 수료했다. 《공간》과 《계간미술》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미술평론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1995) 등을 역임하였다.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고 있으며, 1993년 출판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제1권)가 이 분야의 책으로는 드물게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강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현재는 영남대학교 교수, 영남대 박물관장,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2, 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상, 하> 등이 있으며 편역서로는 <미학에세이>, <회화의 역사> 등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개정판

유홍준 지음,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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