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당당할수록 아름답다

생리통이 부끄럽지 않은 아이, 그리고 유리의 춤

등록 2003.12.01 08:52수정 2003.12.0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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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학부모 도우미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음이 울렸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얼른 확인해보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 저 보라요. 저 양호실에 한 시간만 누워 있을 게요.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못 앉아 있겠어요.'

저는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좋은 이야기 감이 되겠다 싶기도 해서 두 분 학부모님께 그 문자메시지를 보여드렸더니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선생님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그렇고, 요즘 애들이 참 맹랑하네요. 우리는 부끄러워서 말도 못했는데…."

"요즘 애들도 부끄러워하긴 해요. 그런데 제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어요. 당당하라고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잖아요."

처음 여학생을 담임했을 때는 아이들이 생리통을 호소해올 때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눈치가 생리통인 듯싶으면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여자이기 때문에 아픈 거냐?"


그러면 아이들도 그 말이 편한지 "예"하고 얼른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이 어딘지 지혜스럽다기보다는 비교육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식으로 돌려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리 중이니? 참을만하면 좀 참지 그래."

제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아이들도 생리라는 말을 아주 스스럼없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랬는지 이렇게 아주 노골적으로 말을 하는 아이도 생겼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 집에 다녀오면 안돼요? 오늘이 날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아까 좀 전에 화장실에서 그만….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몸의 현상에 대하여 수치감을 느끼기는커녕 당당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조회나 수업시간을 이용하여 제가 여러 차례 이런 말을 해준 것과 상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생리를 하는 것은 한 남자를 받아들이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몸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로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축복할 일이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생리통이 심한 학생은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말하세요. 여자라면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니까 너무 엄살을 떨지는 말고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처음에는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듣는 듯한 쑥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이내 곧 표정이 대담해지고 그렇게 말을 하는 저를 바라보는 눈길도 달라 보입니다.

하긴, 그것이 청소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몸은 다 컸지만 아직은 어린아이인, 그런데 가끔은 그 어린아이 안에 어른이 있는. 그 아이 속에 든 어른이 당당하고 아름답게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학교 축제가 끝났습니다. 몸의 시대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젊고 발랄한 아이들의 춤과 노래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사진의 주인공인 유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유리야, 이 사진 어때? 인터넷에 올려도 되겠니?"
"너무 야해요."

그렇게 말한 아이는 유리가 아니고 그 옆에 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유리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짧게 말했습니다.

"예. 좋아요."

a 학교 축제에서 춤을 추고 있는 유리

학교 축제에서 춤을 추고 있는 유리 ⓒ 안준철

제가 보기에 유리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자신의 몸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을 문제 삼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보다는 중학교 때부터 춤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에서도 스포츠 댄스를 전공할 학생으로서 제대로 된 동작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런 유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술을 하는 아이답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날 저는 유리의 사진이 너무 야하다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야한 눈으로 보니까 야하지. 하긴 유리가 춘 춤은 오래 전에 비밀 댄스홀에서나 추었던 춤이지. 그때만 해도 몰래 춤을 배우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학교 축제 마당에서 학교 학생들이 다 보고, 또 교장 선생님도 함께 보시는 공식적인 무대에서 춤을 추니까 그것이 스포츠가 되고 예술이 되는 거야. 난 춤에 몰입해 있는 유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더라. 몸은 당당할수록 아름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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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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