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털모자와 못생긴 귤

아내가 털모자 짜 주던 날, 제주도에서 귤 한 상자를 받다

등록 2003.12.11 10:00수정 2003.12.1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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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학교 보내 놓고 아내와 단 둘이 남은 오붓한 시간.


"이거 좀 써 봐."

아내가 나를 불러 앉혀 놓고 털모자를 내밀었습니다. 얼마 전 뜨개질을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벌써 완성품이 나왔던 것입니다. 아내는 유난히 큰 내 머리통에 털모자를 푹 눌러 씌워 놓고 이리 저리 살펴보더니 못내 아쉬워합니다.

“아무리 봐도 색깔이 영 맘에 안 들어….”

“헤헤, 따스하니 좋기만 하구먼….”

a 아내가 털실로 뜬 못 생긴 털모자

아내가 털실로 뜬 못 생긴 털모자 ⓒ 송성영

난생처럼 털모자를 써 보는 놈처럼 귀밑까지 푹 눌러 써보기도 하고, 못 생긴 이마 위로 훌떡 제껴 써 봐가며 마당 한가운데를 오락가락 하고 있는 나를 갸웃갸웃 봅니다.

“정말 맘에 들어?”


“그~럼, 나 이거 쓰고 있으니까 바보천치 같지?”

“꼭 나무꾼 같다.”


“그럼 제대로 봤네, 산에서 나무 해다가 아궁이 불때고 사니께 나무꾼이기도 하지 뭐.”

“그래도 좀 촌스럽잖아.”

“촌스럽기는, 무슨 패션 모자 공장 세울 일 있나, 때 빼고 광 내 봤자 본래 촌놈인걸 뭘 그려.”

아내와 함께 기분 좋게 빨래를 널고 있는데 갑자기 개들이 짖어댔습니다. 우체국 택배 자동차였습니다. 우체국 아저씨가 박스 하나를 들쳐 메고 우리 집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과일 상자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귤이었습니다.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김민수 목사님이 보내 온 귤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만나 얼마 전 이메일까지 주고 받았던 김 목사님.

제주도 동쪽 끝 마을 ‘종달교회’의 김 목사님은 <오마이뉴스>에 ‘내게로 다가온 꽃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기사를 쓰고 있는 분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따뜻한 이야기들과 세상에 온갖 예쁘고 이쁜 꽃들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를 묶어 놓은 내 책이 나올 무렵, 책방에 나오는대로 사보겠다며 답 글까지 올려 준 적이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어찌 할 바를 몰라 책 한 권을 보내드렸는데 그 답례품으로 귤을 보내줬던 것입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희들은 드린 것도 없는디, 그 귀헌 귤까지 다 보내주시고유….”

“책에 비하면 너무 약소합니다.”

“아이구, 저야 읽어 주시는 것만 해도 고맙죠.”

김 목사님은 변변치 못한 것을 보냈다며 되려 미안해 했습니다. 그 마음이 그저 고마웠습니다. 김 목사님 역시 조만간 책을 펴낼 예정인데 그 책도 보내 주겠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인터넷은 참 묘한 공간입니다. 전기선 하나로 모든 것을 보여줘 가며 나를 갖고 노는 것 같아 좀 징그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생면부지의 좋은 인연도 맺게 해줍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며 볕 좋은 마당을 뱅뱅 돌았습니다. 내 자신조차도 모르는 콧노래가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아내가 곁눈질로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집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그냥 재미있어서.”

“무슨 재미?”

“못생긴 털모자하고 제주도에서 보내온 귤이 어딘가 닮은 거 같아서.”

“그거 또 오마이에 올리려구 그러지? 아이구, 털모자 얘기는 쓰지마, 아내가 짜준 털모자 어쩌구 하는 거, 닭살여 닭살….”

“닭살이라도 좋다. 사는 게 즐겁고 재미있잖아….”

사는 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뒷짐을 지고 마당을 뱅뱅 돌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빠트린 게 있다 싶었습니다. 아직 귤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귤 상자 안에는 편지가 한 통 들어있었습니다. 노랗게 잘익은 귤을 닮은 노란 편지였습니다.

a 제주도 동쪽 끝 김민수 목사님이 보내온 감귤

제주도 동쪽 끝 김민수 목사님이 보내온 감귤 ⓒ 송성영

편지에는 ‘이제 완연한 겨울입니다. 무농약으로 재배한 못생긴 귤을 보내드립니다. 비록 못생겼지만 맛도 그런 대로 좋고 몸에도 좋을 듯하여 지난 금요일 귤 밭에 나가 직접 따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고 못생겼지만 나누고 싶은 마음에 보내드립니다…’라는 정감 넘치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대로 귤이 진짜로 못생겼습니다. 못생겼지만 진짜 귤 맛이었습니다. 요즘 귤들은 대체로 단맛만 나지 새콤한 맛은 별로 없는 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보잘 것없어도 속이 꽉 찬 사람을 진국이라 합니다. 귤 역시 겉은 못나도 껍질이 얇고 속이 꽉 차 새콤달콤해야 제격입니다.

귤 맛도 귤 맛이었지만 사는 맛이 더 났습니다.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아내가 정성을 다 해 한 올 한 올 뜬 못생긴 털모자와 제주도 동쪽 끝 목사님의 정이 듬뿍 담긴 못생긴 귤이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귤을 두고두고 우려먹을 작정입니다. 귤 껍질은 감기 예방에도 아주 좋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았기에 껍질을 모아 두었다가 볕에 잘 말려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차를 끓여 마실 작정입니다. 목사님이 내게 준 정을 이 사람 저 사람들과 나눌 것입니다.

못생긴 털모자를 귀밑까지 눌러쓴 나는 못생긴 귤 몇 개를 들고 새끼 고양이(얼마 전에 고양이가 새 식구로 들어왔습니다)와 함께 볕 좋은 '뜰팡'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수백 억을 꼴깍 먹어치우고도 여전히 잘났다고 발광하는 인간들은 억겁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요런 새콤달콤한 즐거움을 모를 것입니다. 그들은 볕 좋은 뜰팡에서 두 다리 쭉 펴고 나른하니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새끼고양이 팔자보다도 못한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부러울 것 없이 헤벌쭉 귤을 까먹고 있는데 아내가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손짓합니다.

“저기 봐봐.”

떴다 떴다 비행기였습니다. 하얀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비행기 한 대가 가물가물 푸른 하늘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 제주도 쪽으로 사라지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헤헤, 못 생긴 귤, 참말로 맛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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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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