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아니면 침묵밖에 모르는 아이들

나는 왜 이리도 '말'에 무능한 교사인가

등록 2003.12.30 07:30수정 2003.12.3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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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제 11시가 다 돼서 학교에 왔잖아. 그런데 왜 수업도 빼먹고 종례도 않고 갑자기 가버린 거야? 가방도 학교에 두고 말이야. 그 이유를 설명해 봐. 왜 그런 거야?"
"그냥요."
"그냥이라니? 이틀째 무단 결석하고 다음 날 11시가 넘어서 학교에 나와서는 학교에 가방도 놔두고 갑자기 가버렸는데 그냥이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 아니야? 그걸 선생님이 알아듣게 설명해 봐."
"……"

속에서 불이 나는 것을 꾹 참고 아이의 표정을 살펴보니 반항하는 눈빛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안해서 할말을 잃은 표정은 더욱 아닙니다. 그럼 뭘까?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생각은 있는데 표현하는 능력이 없는 걸까?

"그냥요", 아니면 침묵. 이 둘 밖에 모르는 아이를 나는 어떻게 할까?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매질을 하면 말문이 터질까? 본능에 눌려 죽어 있는 아이의 의식이 깨어날까? 맞고 나면 그것으로 제 잘못을 상쇄해 버릴 텐데. 아니 이 아이는 지금 제 잘못도 모르는데….

그런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많은 아이들의 눈빛이 더욱 따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매를 대지 않는 저를 답답해합니다. 게다가 저는 매를 대지 않고도 마술을 부리듯 아이의 마음을 돌려놓을 멋진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그들에게 무능한 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제가 느끼는 참담한 기분은 말의 무력감을 넘어서 말로 '풀어 먹어야' 하는 교직 자체의 절망감,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잘못은 아이가 하고 왜 내가 힘들어야 하는가? 될 수만 있다면 매를 대지 않고 인격적인 대화로 풀어나가려는 담임을 존경하기는커녕 박력 없는, 답답한 사람쯤으로 여기는 아이들. 그들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도 결국 '말', 말로 해야 합니다.

그날 저는 점심 시간에 아이를 도서관으로 불러 소파에 앉힌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한강에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결국에는 말, 말로 말입니다.


"네가 장학생인데 말이야. 다른 아이들보다도 공부도 잘하고 집안 형편도 곤란하고 해서 너에게 장학금을 주어야하는데 말이야. 선생님이 네가 아닌 다른 아이에게 장학금 주어 버렸어. 그래서 넌 공부를 잘하고도 장학금을 못 받은 거야. 그것도 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말이야. 그래서 선생님께 찾아가서 따진 거야. 왜 네가 받아야할 장학금을 왜 다른 아이에게 주었냐고 말이지. 그런데 선생님이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냥, 그냥 그랬다고 말이야. 그러면 너 열불 나겠냐, 안 나겠냐?"
"열불 나요."

꾹 다물고 있던 아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대답입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오늘 선생님 너 때문에 화가 났겠냐, 안 났겠냐?"
"화 나요."
"왜 화가 났을까?"
"……"
"사람은 말이야. 가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어. 어제 너처럼 갑자기 학교에 있기 싫어서 학교를 나가버린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저지른 뒤에는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그래서 사람인 거고. 선생님이 화가 난 것은, 아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런 깨달음이나 반성이 너에게 없었다는 거야. 어쩌면 넌 잘못을 이미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고등학생이라면 이제 말을 할 줄 알아야 해. 네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할 줄도 알아야 하고.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예."

아이의 입에서 맑게 튀어나온 '예'라는 한 마디가 제게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어떤 억압이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순전한 이해를 통해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지요.

일견 무력해 보이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비폭력의 언어를 매개로 아이들에게 그런 이해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가끔은 억울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잘 풀릴 때도 있어서 해마다 담임업무를 지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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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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