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금 받다보면 어려운 경제 느껴져요"

[새벽을 여는 사람들 53] 궁내동 서울요금소 민원실 이현옥씨

등록 2004.01.03 10:17수정 2004.01.05 09:1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 김진석

35개의 요금소가 있는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는 2004년을 평온히 맞이했다. 요금소 전광판에는 대개의 구간이 '소통원활' 이라고 나타났다. 궁내동 톨게이트의 2003년 마지막 밤은 여느 평일과 다름없이 그렇게 일상으로 이어졌다.

2004년엔 또 어떤 기막힌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져도 서민들은 언제나 그들의 인생에 책임을 지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요금소 전광판에서 깜박이는 '소통원활'이라는 글씨가 2004년엔 사회 전 분야에서 깜박이기를 기원한다.

a

ⓒ 김진석

자신의 자리를 찾아 지하 통로를 건너는 사람이 있다. 궁내동 톨게이트를 지나갈 어느 운전자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도 그의 자리를 찾는다.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한 이현옥(44)씨는 궁내동 톨게이트가 그의 첫 직장이다.

입사한 지 4년이 넘은 그는 요금소 일과 사무보조를 거쳐 고객민원을 해결하는 민원실 근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으레 생각하듯 그저 앉아서 전화 등으로 단순히 민원을 접수 받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250m 가량의 지하통로를 거쳐 요금소 직원이 화장실에 다녀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십 분. 화장실에 가려는 요금소 직원과 수시로 교대하며 기계 점검도 하고 갖가지 사연으로 시비를 거는 고객들과 실랑이도 한다. 양손에 무전기와 전화기를 들고 일 할 채비를 하는 이씨는 자신의 직업을 "각종 심부름을 대신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ADTOP@
a

ⓒ 김진석

"안녕하세요. 민원실의 이현옥입니다."

운전면허를 딴 것, 직업을 갖게 된 것, 종교를 갖게 된 것. 이씨가 인생 중년에 성공한 것 세 가지를 뽑았다. 운전면허를 따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갈 수 있게 됐다. 직업을 얻어 여행에 들어갈 경비를 벌고 종교를 통해 긍정적 사고방식을 갖게 됐다.

"하잘 것 없는 직업이라도 그만두려면 최고가 돼 남이 붙잡을 때 나가라. 당신이 우습게 보는 이곳에서도 최고가 되지 못한다면 과연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씨가 이직률 높은 요금소 직원들에게 항상 당부하는 말이다. 얼핏 보기엔 그저 요금만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단순 직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각종 문의를 해오는 고객들과 요금소 기계 및 사무에 익숙해지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씨 또한 힘들게 배운 노하우가 아까워 한 달, 일 년을 넘겨 현재에 이르렀다. 통행증을 잊어버린 이, 술에 취한 이, 돈이 없는 이, 수작을 거는 이 등 사연도 천태만상이다. 무엇보다도 요금소 직원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안 낸 돈을 냈다고 우기는 사람'이다.

"오 천원을 내고 만 원 냈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겐 도저히 당해 낼 도리가 없어요. 고객은 냈다는데 우리가 안 받았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그럴 땐 무조건 죄송하다고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에요. 싸워서 그 당시 해결이 된다 해도 나중엔 또 불친절하다는 등 다른 것들을 빌미로 바로 인터넷이나 전화로 민원신고를 하죠."

어느덧 이씨는 '관상쟁이'가 됐다며 민원 해결 100%를 자신한다. 대게 그는 사람의 눈으로 거짓과 진실을 알게 된다며 진실된 마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장담했다. 졸음을 쫓으라고 누룽지를 건네는 고속버스 기사, 호두과자를 주는 고객, 화물차를 운전하며 씩씩하게 인사하는 젊은이 등 이씨가 말하는 고속도로엔 좋은 고객이 더 많다.

a

ⓒ 김진석

"인사는 남에게 받기 위해 하는 게 아니에요. 결국 스스로를 높이는 예의라고 생각해요. 인사를 했다고 반드시 답례를 받아야 한다는 건 욕심인 것 같아요.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건 결국 내 자신이 즐거워지기 위해 하는 거죠. 내가 진짜로 웃으면 상대방도 자연스레 웃게 되요. '웃음'처럼 전염이 빠른 건 없거든요."

그는 일을 통해 남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법을 배웠다. 더불어 자신이 번 돈으로 남과 함께 나누는 재미도 얻었다. 부모님께 새 돈으로 용돈도 드리고,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도 쏘고, 어려운 기관에 기부도 한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 직업일지 몰라도 월급을 타는 게 참 재미있어요. 남 몰래 통장에 가둬 놓고 방바닥에 고스란히 쌓아놓은 건 이미 돈이 아니죠. 단순히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것 보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진짜 부자인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버는 일 보다도 마음이 부자가 되는 게 더 어렵고 힘든 일이죠."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이씨에게도 여러 번 일을 그만 두고 싶었던 유혹이 있었다. 주, 야 구분 없는 불규칙한 근무 시간, 삿대질과 갖은 욕설로 시비를 거는 운전자들, 상식 없는 사람들도 모자라 가끔은 애완견이 창문 밖으로 튀어나와 덥석 손을 물어버리기도 한다.

그의 달력 22일(설날)에는 빨간 글씨로 '설날 짱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간만에 남들과 똑같이 쉬어보는 빨간 날이라며 이씨는 좀처럼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씨에겐 일을 그만 두고 싶을 때마다 되새기는 질문이 있다. 일이 삶과 같다면 그래도 그만두겠는가. 일을 노동이 아닌 삶이라 생각하면 그리 쉽게 그만 둘 수 없다며 어느 지인이 그에게 던진 충고였다.

a

ⓒ 김진석

덧붙여 이씨는 자신이 즐겁게 일하는 비결로 '게으름'을 꼽았다. 오늘 잘 안 풀리면 내일 또 그 다음 언젠가는 잘 되겠지. 정말 화가 날 때는 평생 잊지 못할 가장 기뻤던 순간을 생각하며 그렇게 내일의 희망을 믿었다.

문득 그는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신기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컴퓨터는 물론 기계라는 건 만질지도 모른다는 이씨. 그런 그가 유독 잘 고치는 기계가 하나 있다.

요금소 기계가 말썽을 일으킬 때마다 직원들은 가장 먼저 이씨에게 호출한다. 전문적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타가 공인한 기계치이건만 이씨는 요금소에 있는 기계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고치려 든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게 그런 건 가봐요.(웃음) 제가 완전히 수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임시방편 정도는 되요. 그럼 어떡해요? 누군가는 고쳐야 일을 하는데. 그냥 열어보고 뜯어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같은 기계치가 기계를 고친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몰라요.(웃음)"

a

ⓒ 김진석

그가 잠을 쫓는 방법은 많다. 노래를 부르고, 쓰레기를 줍고, 차가 밀린 요금소 직원과 교대 근무를 한다. 노래를 부르니 보는 사람도 흥겨워하고, 쓰레기를 주우니 버리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교대를 하니 힘든 직원이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빨리 안 주시면 100원 더 받을 거예요!(웃음)"

이씨가 고객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지나가는 이들도 덩달아 답례를 한다. 습관이란 건 무서운 가 보다. 20개 단위로 동전을 쌓고 100장 단위로 지폐를 정리하다 보니 이씨는 눈 감고도 한 번에 20개의 동전과 100장의 지폐를 손으로 셀 수 있다. 머리가 잔돈을 계산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계산을 해 버린다는 게 그의 직업병(?)이다.

"제가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여기에 있으면 확실히 경제 상황을 느낄 수 있어요. 오천 원짜리가 많이 남아있을수록, 잔돈을 찾아 돈 꺼내는 시간이 길수록 경제가 나쁘다는 증거가 되요. 조금이라도 살만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적은 요금일지언정 쉽게 만 원짜리를 꺼내요. 그러다 보면 잔돈을 거슬러 주느라 상대적으로 오천 원짜리가 많이 나가게 되죠."

이씨는 최근 돈이 없어 요금을 못 내는 사람과 오천 원권 지폐가 월등히 늘어났다며 서민의 살림살이를 걱정했다. 이어 그는 정치대국, 군사대국, 경제대국보다도 정말 어려운 이들이 잘 살 수 있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당부했다.

a

ⓒ 김진석

책 읽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씨. 그는 여행 다닐 수 있는 다리와 자가용이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있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쳤을 법한 경부고속도로. 간혹 이씨의 정감 어린 인사를 기억해 일부러 그를 찾아 인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읽히는 것 같다며 자신을 기억해 줄 고객에게 2004년에도 진짜 웃음을 건넨다. 이씨가 새해 인사를 전한다. 조금만 게을러지자고. 한 발 늦게 간다고 한 들 어떠냐는 질문을 던지며.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느리게. 운전이든 일상에서든 한 발 늦게 간다고 한들 어떻게 되나요? 모두가 정말 마음이 부자인, 진짜 부자 되세요!"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모임서 눈총 받던 우리 부부, 요즘엔 '인싸' 됐습니다
  2. 2 카페 문 닫는 이상순, 언론도 외면한 제주도 '연세'의 실체
  3. 3 생생하게 부활한 노무현의 진면모...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서양에선 없어서 못 먹는 한국 간식, 바로 이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