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28

등록 2004.01.06 10:39수정 2004.01.0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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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에인의 몸이 옆으로 휙 꺾여들었다. 별안간 눈앞도 아득해졌다. 바람이 거기까지 도착해 그를 강타한 것이었다.

"장군님…."
저 아래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는 주저앉은 채 비탈 쪽으로 향해갔다. 바람이 어떻게나 많은 모래를 실어오는지 잠시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그 자신마저 공중으로 날려 보내질 것 같아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움켜잡았지만 모래바닥에는 잡을 뿌리도 없었다.


그는 간신히 비탈 아래로 내려섰다. 거기서는 더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바람이 그를 모래비탈에 꽝꽝 박아버리는 듯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와 보니 일행들은 강풍을 피하느라 모두 말의 배 밑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이르게 시작된 바람이었다. 게다가 어쩌다가 한번씩 갑자기 찾아온다는 그 강풍이었다.

제후가 되돌아오며 악악 소리쳤다. 바람 소리에 말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뭣들 하는 거요! 움직여요! 빨리빨리 움직여요!"
역시 누군가가 악을 쓰듯 대답했다.
"이 바람에 어떻게 움직여요!"
"그럼 당신은 모래에 매장당하고 싶소?"
"장정 둘이나 말에서 떨어뜨린 바람인데 어떻게 움직여요!"

에인이 능선에서 허리가 휙 꺾일 때 여기서도 군사 들이 말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장군을 기다리느라 능선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강풍이 차례로 나뭇가지를 꺾듯 그렇게 치고 올라간 것이었다.

"그럽시다. 바람이 끝나면 움직입시다!"
은 장수도 합세했다. 제후는 낙타 다리를 꽉 움켜잡고 주위를 돌며 재촉했다.
"여기만 벗어나면 수월해져요. 어서들 움직여요. 말에 의지해서 걸어요. 아니면 당신들은 모두 모래 산이 되고 말아요!"

모두 일어나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한 대의 마차에서 거기에 살린 취사도구들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에인이 급하게 명령했다.
"말들을 마차에 매고 사람들은 마차 위에 누워요!"


사람들이 눕자 마차 속의 짐은 더 이상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사람이 날아오를 듯이 그 몸들이 들썩여졌다. 그들은 바람에 날리지 않으려고 서로 꼭 껴안으며 무게를 지탱했다. 말들도 가끔씩 휘청거릴 만큼 지독한 바람이었다.

바람 소리가 이젠 노골적으로 악악댔고 모래 바람은 온 천지를 뒤덮었다. 다행이 그 강풍 속에서도 말들은 주저앉지 않고 계속 걸어주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묻고 강풍을 통과해가는 사이에도 바람은 예리한 칼날처럼 모래 능선에 척척 꽂혔고 능선도 이제는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안간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었다. 강풍지대도 벗어났는지 사방도 조용했다.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군사들이 소리쳤다. 은장수가 지시했다.
"먼저 인원, 말, 마차를 확인하라!"

취사도구만 날아갔을 뿐 사람도 말도 마차도 모두 무사했다. 제후가 그것을 확인한 후 얼른 먼저 낙타에 올라탔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바람이 사라졌다고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서 빨리 호수를 찾아야 했다. 그는 달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나마 달빛이 살려주는군."

달빛이 아니면 밤에는 낙타도 길을 찾기가 힘든 곳이었다. 그는 한시름 놓고 묵묵히 걷는데 뒤에서 은장수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호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수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면 호수에 도착한다던 손님의 말을 떠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달의 위치를 보아 벌써 밤이 깊었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갑자기 허기가 찾아든 때문이었다.

"그러게 잘 따라오라고 했잖소?"
제후 역시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것은 에인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에인이 모래 산에 올라가 그렇게 시간만 지체하지 않았어도 그 강풍은 피했을 것이다. 그 곳은 열 발자국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지대였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빠져나와야 했음에도 에인은 물론 일행들까지도 태평하게 발길까지 멈추어버린 것이었다.

사실 그는 에인에게 다시금 실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에인은 아직 어린 청년이었다. 주위에 신기한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반드시 참견해야 하는 호기심 투성이의 소년이었다.

삼위산을 지나올 때도 그랬다. 기암기석의 바위 절벽이 보기에 참 신기하다고, 살피면서 가자고 늑장을 부리는가 하면, 원정을 끝내고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오자고 군사들에게 쓸데없는 약속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장군으로서 할 처신이 아니었다. 전투를 앞둔 장군이라면 어떤 말이든 아
껴야 하고 또 비정해야 하거늘, 하찮은 비적을 잡고도 그냥 살려 보내는 마음 여린 소년이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 어린 것이 어떻게 알 것인가. "곡식을 모르는 종족", 그 말종 유목민들은 적장의 머리를 베어 한달 내내 칼끝에 꽂고 다니거늘…. 잔인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그곳의 풍토이거늘 저 순진한 것이 어찌 그걸 알까….'

그는 문득 자신의 신세가 참 초라하다 싶어졌다. 그 머나먼 본국까지 가서 얻어온 것이 저와 같이 어린 장군이었다. 전투경험 한번 없는 애송이였다. 큰 군사를 이끌어본 적도 없이 전쟁터로 나가는 초자 장군이었다.

태왕은 그에게 신기가 있다고, 그것으로 다 해결될 것으로 알지만 전투장은 그와 다르다. 승리나 그 작전은 노련한 판단에서 나온다. 이기고 지는 것은 그 판단력에서 결정된다. 한번도 실전경험이 없는 자가 어떻게 적을 유도하며 또 정확히 칠 것인가. 신이 칼날에 내려앉아 일일이 적의 목을 베어주지 않는 한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실망과 걱정의 거미줄을 뽑아내다가 형제국에서 기다릴 새 군사들을 떠올렸다. 에인의 아버지는 상당히 신중해보였고 그런 만큼 군사들도 잘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또 회의가 찾아들었다.

거기서 모집한 군사들이 5천리 밖의 적을 알까. 그들은 상대의 눈알을 빼서 그걸 노리개로 가지고 노는 극악무도한 종자들이다. 기습작전도 귀신같고 한번 쓸고 간 자리는 씨를 말리는 종족들이다. 여기서야 군사의 덕목을 용맹으로 치지만 거기서는 제압 술이 먼저며 그것은 살기이다.

"저기 달이다!"
한 군사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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