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허깨비였다

<지리산기행 5> 가부장의 상징, 아흔아홉칸 운조루에서

등록 2004.01.05 10:57수정 2004.01.0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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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상징 같은 아흔아홉칸 운조루 ⓒ 김대호

가부장(家父長)의 슬픈 자화상

지리산 여행에서 아흔 아홉 칸 운조루의 10대 종손 류홍수(50)씨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겨울 섬을 보기 위해 완도로 떠날 참이었다.

17개월 된 딸 움이가 많이 아프다는 한 통의 전화로 3개월 간 이어진 내 가난한 여행은 끝이 났다.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난 뒤라 혼수상태에 빠진 딸아이의 손을 밤새 놓을 수 없었다.

기댈 곳 없는 설익은 서른 중반의 가장은 살아 계신 어머니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애타게 그리웠다. 내게도 뿌리깊게 각인 돼 유전된 가부장 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었나 보다.

1993년 8월 11일. 입대하기 1주일 전이었다.

건강까지 잃고 허깨비가 다 돼서 1년만에 '불쑥'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회초리 대신 묵은 기침을 토해내듯 이 한 마디를 던지셨다.

"자식을 잃으면 어미는 피눈물을 흘리지만 아비는 뒤돌아서 피를 토한다."

스물 셋, 영암 용당항에서 철부선을 타고 목포로 시집가던 큰누이는 종아리에 채 멍이 가시지 않아 신방 백열등 밑에서 중매로 만난 새신랑에게 들킬까봐 너무나 부끄러웠단다.

나도 누이만큼 나이를 먹고 또 10년을 보냈지만 매로 자식을 다스리시던 아버지가 1년만에 귀향한 내게 회초리를 들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면회 온 아버지는 지병이 깊어져 1년 전 아들처럼 허깨비가 돼 있었다.

"황소 만한 두 아들놈 앞세우고 논에 가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더라."

집안에서는 물론 동네에서도 절대권력을 누리셨던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동네 이장도, 여당(민정당) 조직책도 아니었다.

떠나실 때가 됐다고 생각하셨던지 가부장의 짐을 덜어내고 언제부터인가 아들에게 몸을 기대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1년 반을 보내고 내가 전역하기를 기다렸다가 가장 불효했던 아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셨다.

아이가 아프고 나서야 이제 조금은 알 듯도 싶다. 이 땅의 가부장들이 왜 뒤돌아 서서 피를 토하는지를….

운조루 종손 홍수씨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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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뼈를 내건 운조루 대문 ⓒ 김대호

딸의 병은 운조루를 다시 보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말 3마리가 끌었다는 수레와 건물의 규모로 종가의 부와 위세를 확인하거나 쥐뿔도 모르면서 들은 풍월로 금구몰니(金龜沒泥, 금 거북이 묻힌 곳) 명당이 어떻다는 둥, 건축양식이 어떻다는 둥 지껄였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내가 운조루에서 확인한 것은 이미 허깨비인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있는 이 땅의 대표 가부장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종부의 가칠한 피부와 오래도록 누적된 것으로 보이는 피로한 표정, 그리고 왠지 텅 빈 듯 외롭고 허탈해 보이는 종손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수백년은 됐음직한 긴장감이 운조루의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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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부사 류이주의 10대 종손 류홍수씨 ⓒ 김대호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의 10대 종손 류홍수(51)씨는 도포자락에 탕건으로 잔뜩 멋을 부린 유학자의 모습이 아닌 시골 장터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류씨는 본인이 좀 어눌해 보이는 것은 운조루를 노린 절도범들이 들이닥쳐 '차떼기'를 하는 것을 막다가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다쳐서라는 설명을 했다.

28살까지 호남석유에 다녔는데 결혼을 하면서 어른들의 명으로 운조루로 돌아왔다. 현재 50여마지기의 논과 밭 12마지기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실제 땅이 얼마나 되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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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라는 천형을 짊어질 11대손 아이들 ⓒ 김대호

"아들은 아빠같이 안 산다고 한다. 젊어서는 내가 종손만 아니라면 하는 생각을 수없이 많이 했다. 그래도 집에 내가 안 살면 농사도 못 짓고 시제를 빼고도 제사가 13개나 되는데 내가 지켜야지 별수 있나."

종손의 길을 버거워 하는 류씨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아들에게 운조루로 돌아오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는다.

본인이 천형처럼 짊어지고 산 종손의 길을 다시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종손에겐 조상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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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에겐 자기 인생보다 조상이 우선이라는 9대 종부 이길순할머니 ⓒ 김대호

류씨의 어머니인 9대 종부 이길순(72)씨는 운조루를 지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단호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 전형적인 양반집 종부의 모습이었다.

"조상을 모시고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은 당연하다. (손자가) 결혼하고 나이가 들면 (운조루에) 들어와서 살아야 한다. (종손은) 자기 인생보다 조상 모시는 것이 우선이다."

사람들은 '류씨 집안 며느리는 시집 갈 때 꽃가마 타고 들어가서 꽃상여 타고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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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씨집안의 여자들은 평생 이 안채를 벗어나지 못했다. ⓒ 김대호

시집오면 죽을 때까지 안채에서 나갈 수 없었고 이 집안 남자들은 안채에 들어가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는 남편과 겸상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할머니에게 요즘 사람들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했으니 남녀구별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위아래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근본은 지켜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너무 문란하고 어른을 어른답게 모시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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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으로부터 운조루를 구한 쌀독 ⓒ 김대호

할머니는 본인도 정조대왕의 후손이라며 집안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쌀독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나눠주었던 이야기며 춘궁기에 생선을 굽지 못하게 하고 굴뚝을 낮게 달아 연기 때문에 인근 백성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던 조상들 자랑이다.

"인공(6.25 당시 인민공화국 치하) 때 인근 지주들은 다 절단 났어도 타인능해(他人能解) 때문에 우리 집에는 해가 없었다. 당시 조직부 위원장이 우리 집 하인 출신이었는데 습격할 때마다 미리 와서 가르쳐 주었다. 조상이 베푼 공으로 후손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본인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추억할 거리와 자랑할 거리가 넘치는 할머니에게 운조루는 어쩌면 행복한 곳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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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의 조아지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나이든 운조루매표원 ⓒ 김대호

그러나 옛 운조루의 영화에 대한 추억이 없는 손자와 11대 종부에게는 이곳은 아버지에게 억지로 대물림하는 천형일지도 모른다.

나는 운조루에서 생명을 단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쉼 없이 자기최면을 거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을 보았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허깨비였던 어머니들의 행렬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들의 가부장과 알맹이는 도대체 누가 가져간 것일까? 아버지로 살아가기엔 너무 슬픈 시절인 것 같다.

섬진강에서 만난 밥도둑
육즙 맛이 깊은 섬지농원 참게장

▲ 참게장을 잘만드는 박점순씨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볼 때마다 섬진강에서 맛본 밥도둑 참게장 생각에 군침을 삼키곤 한다.

몸통을 통째로 들고 '으득으득' 베어먹을 때 전해지는 잘 숙성된 육즙 맛도 일품이지만 등껍질을 벗겨 밥을 비벼먹는 맛은 가히 천하일미가 따로 없다.

간장을 쓰지 않고 재래간장으로 참게장 맛을 제대로 내는 곳은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에 있는 섬지관광농원이다.

양조간장은 입맛을 당기기는 하지만 육즙의 맛과 향을 죽여 입안에 남는 깊은 속맛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 주인 박점순씨(여·39)의 설명이다.

참게장 만드는 법을 시어머니에게 전수 받았다는 박씨에게 전해들은 대강의 비법은 이렇다.

참게를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다 차곡차곡 넣고 재래간장을 부어 간이 들 때까지 3간을 담궈 둔다. 그리고 5일 간격으로 장을 퍼내 팔팔 끓여 다시 붓기를 세 번 이상 반복해 숙성시키면 된다는 것.

근 20일만에 참게장이 완성되는 것인데 잘 띄운 메주와 좋은 물로 숙성된 간장 맛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간편하게 매운탕을 끓이거나 무침으로 먹기도 하지만 생무와 풋고추를 썰어 넣어 시원한 맛을 내고 마늘과 깨소금을 듬뿍 넣어 담백한 맛을 내는 참게장이 참게요리의 으뜸이다.

지금은 한 마리에 1만원을 호가하지만 예전에는 반찬이 없으면 주전자 들고 잠깐 나가면 일주일 먹을 양은 금방 잡을 수 있을 만큼 흔했다고 한다.

섬지관광농원에서 만난 참게 마니아들은 섬진강 모래를 팔아먹기 위해 무분별하게 준설하면서 산란장이 파괴됐고 강변로를 개설하면서 지리산과 유통로를 막아버린 탓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거기다 밤나무에 대한 항공방제도 강물이 오염되고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한 개체수 감소도 큰 원인일 것이다.

부디 섬진강이 다시 살아나 밥도둑 참게장이 우리의 식탁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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