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달걀밥, 달걀 과자

[어릴 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 16]달걀 껍질에 쌀을 쑤셔 넣어 만든 달걀밥

등록 2004.01.30 18:54수정 2004.01.3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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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
암탉김규환

여름 내내 집안 식구들에게 몸보신 일등공신이었던 닭은 이제 스무 마리도 안 된다. 그나마 몇 마리 남겨둔 것은 장닭 세 마리에 씨암탉 아홉 마리인데 장닭은 한 마리만 있어도 무방하다. 장닭은 거느리는 힘이 어찌나 세던지 한 놈이 서른 마리도 거뜬하다.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는 작업이지만 옆집 수탉으로부터 암탉을 지키는 절대 강자다.


1월 말 햇살이 그리운 어느 날 "꼬꼬댁 꼭꼭 꼭꼬댁 꼭꼭꼭" 개가 지나가지도 그렇다고 대밭 족제비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오후 세시 무렵 암탉 한 마리가 고운 목소리로 울어댄다. 이 때 마당에서 한가로이 땅을 헤집던 장닭(수탉)도 "쾍" 하며 덩달아 우짖는 까닭은 무엇인가.

고요한 시골마을 한 복판을 시끌벅적하게 바꿔 놓은 암탉이 외양간 위 짚단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조심조심 걸어 나온다. 말래(마루)에서 쉬고 있던 나는 수사관이 현장 검증하듯 걸어 나오는 방향을 찾아 유심히 살폈다.

'그래! 네가 거기다 둥지를 틀었구나.'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달걀찜을 해먹고 아침마다 아버지가 날 달걀로 "쪽쪽" 빨아대는 모습을 며칠 동안이나 볼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기다렸고 찾느라 애를 먹었던 터다.

아버지는 내가 뭘 할지 아시는 분이라 입구를 가능하면 작고 예쁘게 뚫어 어렵게 빨아 드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뭘 할지 아시는 분이라 입구를 가능하면 작고 예쁘게 뚫어 어렵게 빨아 드셨습니다.김규환

"엄마 찾았당께요. 달걀 낳은 데를 알아냈어라우. 꺼내 오끄라우?"
"모시('모이'의 사투리)를 많이 안 줘서 요샌 낳지 않은 줄 알았다. 바가지 갖고 가서 꺼내 오니라."
"예."


알을 낳고 나온 암탉은 더 날렵해 보였다. 살금살금 쇠죽 솥 언저리 부삭(아궁이의 사투리) 위에 발을 딛고 구유에 한 발 올려 가로로 댄 나무를 밟아 위로 기어 올라갔다. 먼저 박 속을 파내 쪄 말린 바가지를 위에 올려놓고 대롱대롱 매달리듯 간신히 몸을 올렸다.

지푸라기는 쥐가 잘게 잘라놓고 닭구새끼(닭을 속되게 부르는 사투리)들 놀이터가 된 탓인지 어지럽혀 난장판이 되어 있다. 어둠침침한 주위를 살펴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을 한참 동안 감았다가 다시 떠보니 조금 적응이 되어 분간할 수는 있게 되었다.


발이 빠지지 않게 조심히 엎드려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포근한 짚다발 사이가 움푹 패어 있다. 다가가 보니 요새 며칠 꺼내지 않아 일곱 개나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중 하나는 노랗다기보다 불그스름하고 따끈따끈하다. 덜 마른 빨간 피도 묻어 있다.

재래종 토종닭이 낳은 달걀은 크기로 따지면 메추리알 세 배 밖에 안 되게 작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세어가며 달걀을 다 담아서 달걀 담긴 바가지를 위에 두고 몸만 거꾸로 내려오는데 그 사이 황소가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나 궁금했던지 구유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다.

"이랴! 쩌리 안 갓!"

발로 툭 한번 콧대를 차니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선다. 가로로 된 나무 위에 발을 걸쳐놓고 바가지를 꺼내 마당을 가로질러 정지로 행했다. 어머니는 오늘도 일찌감치 저녁을 지어먹고 조리를 만드시려는지 벌써 밥을 앉히시려고 물을 데워 설거지를 한다.

"엄마, 요놈이 오늘 난 것잉께 아부지 드시라고 하싯쇼."
"니기 아부지한테 갖다 드려라."
"예."

노른자가 퍼진 달걀
노른자가 퍼진 달걀김규환


쪽문을 열고 보니 아버지는 조리를 이기고 계셨다.

"아부지 엄니가 따끈할 때 드시라그요."

아랫니에 달걀을 갖다대고 "톡톡톡" 세 번 두들기니 조그만 구멍이 하나 생긴다. 달걀 껍질을 손으로 떼어 내시고 막을 손톱으로 걷어낸다. 입에 갖다 대시더니 "쪽쪽" "쪽쪽쪽" 몇번 빨아들이는 소리가 나더니 "쏙" 하고 빨려 들어간다. 여기까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아버지의 그 다음 말씀과 행동을 골똘히 지켜보던 순간,

"예따"
"고맙구만이라우."
"니 엄니한테 가서 굵은 소금 한두 개 주라그려."
"예."

입구를 더 크게 뚫어서 쌀 넣을 준비를 하고...
입구를 더 크게 뚫어서 쌀 넣을 준비를 하고...김규환


시렁 위에 넘어져 깨지지 않게 조심히 달걀 껍질을 올려놓고 소금을 갖다 드리고 나서 내 밥할 준비에 들어갔다.

"엄니, 쌀 좀 주싯쇼."
"달걀 밥 해묵을라그냐?"
"다 암시롱 그래싸요."

달걀 입구를 약간 더 크게 네모난 젓가락으로 콕콕 쑤시고는 일어 놓은 쌀을 숟가락으로 떠서 담는다. 조금이라도 더 들어가게 하려고 젓가락 끝으로 쑥쑥 다져 넣는다.

"휴-. 다 했다."
"엄니 안 넘어 가게 하싯쇼잉."
"걱정 붙들어 매고 불이나 때 얼렁."

밥솥에 불을 때고 국솥에 불을 옮겼다. 이어 밥에 뜸을 들이고 나니 발갛던 잉그락(잉걸)도 잦아들어 재로 변해 간다. 이 때를 손꼽아 기다려온 나는 부지땅(부지깽이)으로 잔불이 남아 있는 재에 자그맣게 구덩이를 팠다. 쌀을 넣어둔 달걀에 넘치지 않을 만큼 물을 부어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살살 파묻어 놓는다.

어머니가 밥을 푸는 사이 "피식" "피시식" 소리를 내며 달걀밥이 넘쳐 얼마 남지 않은 불씨를 꺼트리는가 보다.

"원메 저리 자꾸 넘치면 안되는디…."
"지가 알아서 됭께 염려 말고 밥 묵게 방이나 걸레로 한번 훔치거라."

마루에 놓인 걸레는 땡땡 얼어 있었다. 동태처럼 언 걸레를 잠시 방안에 놓고 녹여 조릿대 껍질을 한쪽으로 밀치고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흠흠"
"엄마 꼬순(고소한) 냄새나는디 다 됐는갑소."
"하마(벌써. 이미) 다 됐을꺼다."
"인자 꺼내도 돼겠지라우."
"그려."

부지땅으로 슬슬 주변을 파보니 겉은 반쯤 타들어 갔고 입구는 탱탱 불은 쌀이 예닐곱 개는 흘러 나와 있다.

"앗 뜨거!"

"후후" 입으로 불며 뜨거움을 참아내며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탄내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고르게 잘 익었다. 벗겨진 곳엔 덜 빠진 노른자가 덧입혀져 노르스름해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반은 약간 설컹설컹 씹히는 밥이고 나머지 절반은 구워져 단단하게 뭉쳐 있다. 한 입 베어 물자 입안에는 고소함이 가득하다. 날 달걀이나 달걀찜 하던 날에는 난 달걀밥, 달걀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쌀을 앉히고 물 붓고 잔불이 남은 재에 파묻어 놓으면 고소하고 구수하며 꼬순 달걀밥이 만들어 집니다. 과자 대신 먹기도 하는데 껍질 째 그냥 씹어 먹었던 기억도 나는군요.
쌀을 앉히고 물 붓고 잔불이 남은 재에 파묻어 놓으면 고소하고 구수하며 꼬순 달걀밥이 만들어 집니다. 과자 대신 먹기도 하는데 껍질 째 그냥 씹어 먹었던 기억도 나는군요.김규환

덧붙이는 글 | 이젠 시골에 가도 불을 때지 않아 이 맛을 보기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해 먹고 말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젠 시골에 가도 불을 때지 않아 이 맛을 보기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해 먹고 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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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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