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떼로 쥐불을 돌리다

무안군 월선리 예술촌 대보름 풍경

등록 2004.02.05 15:04수정 2004.02.0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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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을 바라보는 도예가 문호씨의 수준급 쥐불돌리기 ⓒ 김대호

50을 코앞에 둔 어른들이 마을에서 떼로 소란을 피우기로 작당을 했나 보다.

입춘하고도 대보름 하루 전날.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예술촌에는 아이들도 아닌 어른들의 쥐불놀이가 마련됐다.

물론 애들도 따라오긴 했지만 뒷전으로 밀려나고(깡통을 잡아 보지 못한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순전히 어른들을 위한 놀이판이다.

밤잠이 많은 동네 어르신들은 잠이 드실 9시, 이 발칙한 어른들은 잠시 후 도시를 탈출해 시골구석 김문호(48·도예가)씨 공방으로 삼삼오오 모여들 것이다.

“소시 적에 놈의(남의) 짚베늘(겨우내 소 먹이기 위해 쌓아 놓은 짚더미) 많이 태워 묵었는디…" -박기현(50)씨-

누군가 육묘용으로 쓸 요량으로 비닐하우스에 모아둔 분유통을 슬쩍 공수(?) 해온 이들은 망치를 들고 대못으로 구멍을 ‘송송’ 낸다. 목포에서 오곡밥을 지어 들어 닥칠 이들과 한판 놀아보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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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여섯이 일렬로 서서 연출하는 재미난 퍼포먼스 ⓒ 김대호

가느다란 철사를 새끼처럼 꼬아 야무지게 묶고 잘 마른 솔가지를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솔방울도 군데군데 집어넣어 화력을 보충한다.

“보름날 자먼(자면) 눈썹에 쌔까리(이)가 엉근다고 했는디 날 새야 것네(눈썹이 하얗게 샌다)…" -박복규(45)씨-

아까부터 ‘어른들이 애들처럼 철없이 뭐하는 짓이냐’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던 양공육(45·전남체중 교사)씨도 슬그머니 깡통을 하나 집어 들고 나선다.

애당초 깡통을 공수해 올 만큼 열성적이었지만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춥다고 따라 나오지 않아 조금은 심통이 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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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밥에 묵은나물, 냉이무침까지 푸짐한 대보름 밥상 ⓒ 김대호

가장 열성적이던 복규씨는 교회 장로님 체면에 차마 깡통을 돌릴 수 없었는지 ‘오곡밥’이 도착하기 전에 자취를 감춘다. 아마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주고 조용히 사라지려고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참으로 곱다.

낼모레 흙집을 지으려고 터를 잡아 놓은 기현씨가 깡통에 불도 붙이기 전에 성주님(집을 지켜주는 귀신)에게 ‘쥐불놀이’로 인사를 드린다며 너스레를 떤다.

“옛날에는 대문, 문지방 개릴(가릴)것 없이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써 붙이고 ‘뱀 잡자 구렁이 잡자’ 소락대기(고함)를 질렀는디 요새(요즘)는 안하드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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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도 손수 쥐불을 돌린다. 왕년에 돌려 본 솜씨다. ⓒ 김대호

모두 저녁까지 굶고 오곡밥에 나물을 먹겠다고 목포에서 기진씨(48·남)를 기다렸지만 시간은 10시를 가리킨다.

“이러다 달님도 주무시것네. 우리라도 나가서 한번 놀아보세.”

문호씨가 종모(17·목포예고 입학예정), 토담(13·청계서초등학교)이 두 아들을 이끌고 먼저 논두렁을 향한다.

쑥스럽게 시작한 깡통 돌리기는 어느새 어른 아이 할 것 없는 환성소리로 바뀌고 ‘획획’ 바람을 가르며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달님도 ‘쑤욱’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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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불을 놓을 깡통을 만드는 오십줄의 기현씨 ⓒ 김대호

잠시 후 산 너머에서 유기농을 하는 새마을지도자 박대윤씨(47·남)가 언주(19·목포기계공고), 희홍(17·홍일고 입학예정) 두 아들을 앞장세우고 나타난다.

형수님이 직접 끓인 시레기 된장국에 냉이무침도 있다는 소리에 ‘함성’이 터진다.

잠시 후 기진씨를 선두로 자가용 두 대가 들어서고 10여 명이 깡통을 들고 대열에 합류한다.

“여보 어떻게 해 안 되는데. 나 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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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에 돌리는 쥐불에 스트레스는 다 날아가고... ⓒ 김대호

박연(47)씨가 엉거주춤 엉성한 포즈로 쥐불을 돌리면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종호(48·홍일고 교사)씨는 아내 속도 모르고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바쁘다.

옆에서 친구인 박연씨의 애교섞인 말투를 흉내 내는 조복희(47·여)씨는 터프한 몸집답게나 제법 그럴싸하게 쥐불을 돌린다.

"형수, 형님 거시기 야물게 묶어 노씨요. 애기들 불장난 하먼 오짐(오줌) 싼께."

기진씨의 농담에 주변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나 아는지 모르는지 어른들을 따라 히죽거린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쥐불놀이는 인근 도랑 논둑을 다 태우고서야 멈추었다.

그 다음엔 오곡밥이 그득 차려진 공방으로 이동했다. 각종 나물에 밤까지 넣은 오곡밥이 입맛을 돋운다. 김 위에 오곡밥을 싸고 그 위에 묵은 나물을 빼곡히 쌓은 다음 한 입에 ‘꿀떡’ 삼키고 냉이 나물에 시레기된장국 국물이면 황후장상의 찬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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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을 하는 대윤씨와 두 아들. 아버지가 더 즐겁다. ⓒ 김대호

내가 기억하는 정월대보름에는 마을에서 제일 존경받는 인물로 제주를 뽑았다. 제주는 10여 일을 금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피했으며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을 당산나무와 우물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막았는데 아이들이 실수로 황토표식 안으로 들어갈 양이면 어른들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경을 치기도 했다.

풍물패가 당산 나무와 우물에 제를 올리고 나면 집집마다 액막이를 나서는데 집주인은 문을 활짝 열고 소주에 한상 걸게 내와 놀이마당이 벌어지는 ‘집단적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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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어른들 판에 끼어든 13살 초등학생 토담이 ⓒ 김대호

그 축제는 길게는 1주일 이어지기도 했는데 그 전엔 보름 동안 이어졌고 그 사이 처녀총각들이 눈이 많이 맞았다고 한다.

이제는 날선 식칼을 놓아 부정을 경계하며 찬물로 목욕재개하던 제주는 더 이상 없다. 보름 동안 이어지던 축제도 없으며 풍물패를 이끌던 갑돌이와 갑순이는 황토노을을 따라 가버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정월 대보름이다.

날이 새면 먼저 ‘더위’를 팔겠다고 서로 벼르는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동행한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낮선 풍경이지만 마냥 즐겁기만 한 모양이다.

나이 오십이 되서야 다시 시작한 이들의 쥐불놀이가 내년에도 또 내년에도 그리고 아이들대까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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