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그렇게도 쓸만한 필자가 없나

단골 논객 송복과 유석춘의 경우

등록 2004.02.08 10:46수정 2004.02.0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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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필자 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00년 8월 7일의 기고 거부 지식인 선언 이후의 일이다. 문제의식 없이 기고했던 진보적 지식인, 높은 고료에 별 생각 없이 기고했던 문인, 시민단체 활동가 등 수천명의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대한 기고와 인터뷰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선언자 개인뿐 아니라 지식계 전반에 영향을 끼쳐 원고청탁을 거절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얘기다. 선후배 등 인간관계를 앞세워 집요하게 공략해도 명예를 중시하는 지식인사회에 한번 형성된 기류는 요지부동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허구한날 등장하는 필자와 글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독자들도 질릴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논객이 연세대 사회학과 스승과 제자 사이인 송복 명예교수와 유석춘 교수다. 이들의 글쓰기 패턴은 조선일보를 꼭 닮았다. 결론을 정해놓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갖은 억지를 동원하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먼저 유석춘의 2월 5일자 아침논단 ‘개혁의 탈을 쓴 퇴보’를 보자.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유석춘은 한국 사회의 긍정적 변화의 사례들을 들며 “언제부터 우리가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에 살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던가”라고 썼다.

지금이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회학자가 이것을 긍정적 변화의 사례로 들 수 있는가? 지나치게 소비가 위축되어 있는 현실을 걱정하는 소리를 그렇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소비란 지구 자원의 ‘소모’이기 때문에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유석춘이 정작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가 ‘부정적인 변화’로 규정한, 자신이 반대하는 현상에 대한 저주다. 젊은이들이 “하향평준화의 덫에 걸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관에 경도되어 있다”고 한다.

논리가 점프도 모자라 뒤죽박죽이다. 그러면 지금의 교육정책을 바꿔 사교육을 장려하고 우열반을 공식화하며 대학별 입시를 부활하면 상향평준화가 되어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거시적이고 이타적인 가치관이 생성될까? 그 반대일 것이다.


유석춘은 “핵의 위험성 때문에 지역 주민이 동의한 방폐장 건설도 좌절시킨 환경단체들이 한반도의 다른 한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사용 핵개발에는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일”도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변화의 현장”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어리둥절하다.

앞부분은 부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사실관계도 파악하지 않은 것이다. 부안지역 주민들이 핵 폐기장 건설에 동의한 적이 없다. 핵 폐기장 건설을 좌절 일보직전까지 가게 한 것도 지역주민들이다.


유석춘에게는 금강산이라도 한번 다녀오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획책하는 미국에 대해 유지하고 있는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은 모습’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유석춘은 “기존의 당적을 고수하면 ‘개혁의 대상’이 되어 심지어는 자살이라는 선택까지도 강요당하는 현실을 과연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며 절규한다. 안상영 전 부산시장을 지칭하는 것이다. 제 정신이 아니다.

이틀 후(7일자)에는 송복 칼럼 ‘지배세력 유감’이 등장한다. 송복은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비판하면서, ‘지배세력’은 마르크시즘이 풍미하던 지나간 시대의 용어라고 주장한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다. 그 증거로 “지금 어느 노동자가 자기는 피지배세력이고 피착취자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어느 사용자가 자기는 지배자이며 착취세력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침을 튀긴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런 의식이 있건 없건,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다. 마르크스 이론에서 이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과학적으로 논박을 해야지 그런 의식이 희박해진 현실을 들먹이며 합리화하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 이하 작금의 사회를 지식사회로 치환하고, 자본을 지식으로 대체하고, 그래서 “삼성전자는 자본으로서의 삼성전자가 아니라 지식으로서의 삼성전자”라고 둘러대는 등의 굴절된 논리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잊는다.

송복은 “정확한 용어의 선택이 커뮤니케이션의 원류”라고 했다. 그 전에 사회에 대한 정확하고도 과학적인 인식이 커뮤니케이션의 원류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그래야 용어의 선택도 정확하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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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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