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이 가장 행복했던 '서귀포 시절'

제주기행(3)

등록 2004.02.17 15:51수정 2004.02.1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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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거리로 오시다보면 이중섭 기념관이 있을꺼우다.”
“이중섭 거리요?”
“모르시면 물어물어 찾아옵소.”


제주도 '여성의 쉼터' 강미경 원장이 우리에게 다짜고짜 이중섭 기념관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서귀포에서 남편에게 학대받고 버림받은 여성들의 안식처를 운영하고 있는 강 원장은 늘 그렇듯이 여장부처럼 씩씩했습니다. 내가 생판 낯선 서귀포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 머뭇거리자 딱 부러지게 약속장소를 정했습니다.

서귀포 토박이 강 원장은 국선도 수련자이기도 한데 '여성의 쉼터' 사람들과 함께 1년에 한두 차례 계룡산 갑사 주변에 자리잡은 '한밝음생명사랑회'를 찾아옵니다. 한겨레 문화센타(한겨레신문) 사람들과 함께 명상 캠프를 열기도 하는 '한밝음생명사랑회'는 얼마 전 우리 동네로 옮겨왔습니다.

우리 식구는 국선도 수련자들이 운영하는 '한밝음생명사랑회'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는데 강 원장 역시 그런 연줄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사실 강 원장보다는 남편 오대건씨를 먼저 알고 지냈습니다.

국선도 수사로 있는 오대건씨 역시 제주도 토박이입니다. 한동안 계룡산 갑사 옆에 딸린 내원암에 머물면서 우리 집을 종종 찾아왔습니다. 제 것보다 남의 것을 먼저 챙기는 오대건씨는 좋은 것은 다 좋다하는 한없이 좋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좋다보니 부인에게는 늘 실없는 남편이지만 말입니다.

이중섭 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이고 ‘이중섭 기념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무작정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여성의 쉼터 강 원장과 남편 오대건씨가 함께 나왔습니다. 언제나 남루한 갈옷 차림으로만 기억되던 오대건씨 역시 부인처럼 개량 한복으로 단정하게 차려 입고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오대건씨는 제주도에 도착하여 일찌감치 만나고 싶었는데 그의 친척 결혼식 때문에 뒤늦게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에서는 아직도 결혼 잔치를 사흘 내내 치른다고 합니다. 가까운 친척들 역시 사흘 내내 잔치 집에 얼굴을 내민다고 합니다.

오래 전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랜 풍습은 보기에 따라서 좋다 나쁘다로 갈리겠지만 나는 좋다고 보는 쪽입니다. 여유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좋아 보입니다.


빡빡하게 맞춰진 시간을 기다렸다가 급하게 치르고 후딱 신혼여행지로 출발해 버리면 그만인 요즘 결혼식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인 결혼식을 바쁘게 치러야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사실 그 바쁜 일을 쪼개 놓고 보면 별거도 아닌 듯싶습니다. 다들 돈벌이를 좀 더 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시간을 좀 더 갖겠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만큼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쁘게 사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행복한 시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결혼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헌데 행복의 대명사인 결혼식조차도 급히 서둘러 치른다면 그만큼 행복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의 결혼 풍습은 참 좋아 보였습니다. 넉넉하니 여유가 있어 좋아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중섭 기념관에서 사진으로 찍어 놓은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흔히들 이중섭을 천재화가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그림들을 천천히 들여다 보면서 예전 생각처럼 그가 왜 무엇 때문에 천재화가라 불리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아주 평범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적어도 서귀포에서의 1년 동안의 생활을 되짚어 보면 천재화가 따위의 수식어와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제주도에서 그린 그의 그림은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긴 가장 평범한 그림들이라고 봅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담뱃갑의 은박지에다가 못이나 침으로 긁어 그림을 그렸다하여 천재화가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가 천재라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그에겐 그림을 그릴수 있는 이렇다할 재료가 없었고 다만 그 재료가 은박지였던 것 뿐이었으니까요.

사실 그런 면에서 천재는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붙여야 할 것입니다.(천재, 그야말로 하늘이 내준 인재라는 의미로 쓰인다면) 평상심을 잃지 않고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가장 '천재적'으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 선생은 천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제주도에서의 생활과 그 평범한 삶을 담아 냈던 그의 평범한 그림들이 그렇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1년 가까이 머물면서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다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당시 그림은 그 곳에서 고마움을 베풀어 준 사람들에게 선사한 그림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이중섭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경치를 그린 <섶 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과 <서귀포 환상>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가 우리 고향입니다. 어려서부터 이 동네에서 자랐지요. 이중섭 선생이 머물렀던 바로 그 동네입니다. ”

이중섭 기념관 바로 밑에는 6·25 민족전쟁 때 피난 온 화가 이중섭이 1년 동안 머물렀다는 초가집이 있었는데 '여성의 쉼터' 강 원장은 어렸을 때 이곳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이 집에는 여전히 그때 그 주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집에 서 있으면 눈앞에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서처럼 섶 섬이 삼삼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화가 이중섭. 그는 1951년 36세 때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 와서 두 아들과 아내, 네 식구가 1년 가까이 생활했습니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했습니다. 때로는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이 방이 네 식구가 생활했던 방인데요. 상상이 안가죠. 이렇게 좁은 방에서.”

아, 나는 그 방을 본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방 중앙에는 이중섭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한 평 반도 채 안 되는 그런 아주 작은 방이었습니다. 여기서 네 식구가 생활했다고 합니다. 단지 피난 시절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습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 원장이 내 생각을 대변했습니다.

a 서귀포에서 생활할 때 화가 이중섭의 가족들은 한 평 반도 채 안 되는 이 방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서귀포에서 생활할 때 화가 이중섭의 가족들은 한 평 반도 채 안 되는 이 방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 송성영

“이곳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답니다. 이해가 가세요? 요런 작은 공간에서 살면서.”
“아,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아마 그 때가 가장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라고 푼수처럼 떠들어댔습니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네 식구가 뒤엉켜서 살을 맞대고 잠들 수밖에 없었던 방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던 공간이었습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내게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간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오마이 뉴스>에 ‘한 평 반 짜리 작업실’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작업실입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다 쓰려져 가는 사랑채에 딸린 형편없는 공간이지만 안에서 볼 때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공간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눈앞에 둔 이중섭의 한 평 반 짜리 공간을 보자마자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 작업실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중섭의 공간은 네 식구가 함께 살았던 공간이었습니다. 네 식구를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내 공간에 비한다면 그 행복감이 네 배나 컸을 공간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중섭은 이 한 칸 반 짜리 공간에서 살았던 서귀포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훗날 내가 제주도에서 돌아와 알게 된 것인데 이중섭 선생이 서귀포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었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그림이 그것이었습니다. 서귀포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그리운 제주도 풍경'이라는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글도 보냈습니다.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글 중에서-

내가 그림 보는 안목이 없어서인지 이중섭의 그림이 흔히 말하는 천재화가의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중섭의 그림은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에서 느껴지듯이 편안해 보입니다. 그림 속 소의 움직임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몸짓이 즐거워 보입니다. 가족들이 행복해 보입니다. 여느 화가의 그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분명 가난 속의 행복이 느껴집니다. 고통스럽거나 찌들려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 여겨집니다. 적어도 서귀포에 생활하면서 그렸던 그림들이 그렇습니다. 한 평 반도 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린 그림들, 저토록 좁은 공간에서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이중섭 그림의 진가는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은 없었지만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뒹굴어가며 게를 잡고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 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은 그의 행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이중섭의 이상향을 그렸을 뿐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그렇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그림 속의 행복은 현실에 가장 가까웠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중섭은 가난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걸 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그 어떤 것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행복감을 표현하려 했던 수단으로 다가옵니다.

제주도 피난민 시절,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구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생활에 또 무엇이 필요했겠습니까? 마음이 편하면 입는 것 먹는 것 잠자리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아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말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이중섭 선생의 그 작고 좁은 방 앞에서 오래 동안 넋을 놓고 서 있었습니다.

1952년 7월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으로 간 뒤 4년 만에 마흔의 나이로 서울 적십자병원 시체실에 무연고자로 방치된 채 삶을 마감해야 했던 이중섭.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배급을 받아 가며 근근히 생활했던 제주도 피난민 시절, 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좁아터진 방에서 네 식구가 오글오글 생활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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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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